계절에는 저마다의 고유한 향기가 있다. 달이 바뀌고 공기의 온도와 습도가 미세하게 달라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들은 시간의 열쇠처럼 굳게 닫혀 있던 과거의 문을 열어젖힌다. 익숙한 향이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오는 건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자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일지도 모른다. 여름날 소나기 후 흙냄새, 겨울의 시린 공기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 냄새처럼. 각각의 향기는 특정한 시공간을 호출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 세상의 모든 계절은 단 한 사람과의 기억으로 이어져 있었다. 포근함이 스며들던 봄밤의 공기는 함께 걷던 가로수길의 어느 저녁을 떠올리게 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속삭이던 대화와 스치던 손끝의 온도까지. 아스팔트가 내뿜는 뜨거운 한여름의 열기는 상수역 어느 골목을 불러왔다. 마른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무서지는 냄새가 날때면 작년까지 함께 살았던 집 앞의 풍경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다. 첫눈이 내리던 날 차가운 쇠 냄새는 아기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던 어느 겨울의 아늑한 온기를 생각나게 했다. 그렇게 모든 계절의 향기는 그분과 함께한 시간과 공간의 좌표였다. 나의 세계는 온통 그 기억들로 촘촘히 채워져 있었고 그녀라는 거대한 지도가 나의 모든 감각을 안내하는 듯했다.
그분이 곁을 떠난 지 이제 두 달. 시간은 무심하게도 흐름을 멈추지 않았다. 계절은 여전히 약속처럼 바뀌며 고유의 향기를 풍긴다.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그런데 이제 익숙한 냄새들이 전혀 다른 기억의 서랍을 열기 시작했다. 최근의 선명했던 기억이 아닌, 그분을 만나기 이전의 시간들로 나를 데려간다. 그분이 없던 시절 외로움과 막막함이 안개처럼 가득하던 시절의 기억들로.
마치 기억의 지층에 거대한 지각 변동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나는 시간을 거슬러 혼자였던 2016년 이전으로 되돌아간다. 계절의 냄새는 그대로인데 왜 그것이 열어주는 기억의 장소는 이렇게 달라졌을까. 내 삶을 뒤덮었던 선명하고 찬란했던 기억들은 어디로 증발하고 더 오래되어 빛바랜 기억들이 먼지를 털고 나타나는 걸까. 기억이 견고한 탑이 아니라, 바람에도 흔들리는 종이성처럼 느껴진다.
기억의 이런 기묘한 속성 앞에서 지금 내가 어떤 시간의 좌표 위에 서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과거로 퇴행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다른 형태의 현재에 적응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계절의 향기 속에서 옅어지는 기억과 새로 떠오른 기억의 흐릿한 경계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 나는 어떤 미래로 나아가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