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퇴근길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 쓸데없는 걱정과 스트레스는 사소하다

by 낭만피셔

차비 몇 푼이 아까워 무작정 걷던 20대 시절의 나. 이제는 걷지 않으면 생각을 정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급하지만 않다면 30-40분쯤은 사색을 위한 공간을 위해서 걷는다. 별일이 없을 땐 이런저런 망상 속을 떠다니고 고민과 걱정이 있을 땐 실타래를 풀기 위해 길을 걷는다. 3박 4일의 도피 같던 여행이 끝나고 오랜만에 돌아온 월요일. 평소보다 무거운 스트레스가 어깨를 짓눌렀다. "진짜 퇴사를 해야 할까” "그만두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좀 쉴까 아니면 이직을 준비할까” 납덩이처럼 가라앉는 고민들을 안고 전철역에서 집까지 걷기 시작했다.


빨간 불로 바뀐 횡단보도 앞에서 핸드폰을 보다가, 맡겼던 필름 스캔이 끝났다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제주도의 시간들. 잘 나왔을까. 지난번 필름은 노출을 잘못 잡아서 다 날아갔는데, 이번에도 그러면 안 되는데. 다행히 사진은 전부 살아있었다. 심지어 기대보다도 좋았다. 필름 카메라는 제비 뽑기를 닮았다. 찍을 때보다 봉투를 열어 결과를 확인할 때의 설렘. 노출이나 구도 같은 건 공부하지 않는다. 내가 찍으면서도 어떻게 찍힐지 모른다. 생각한 대로만 나오면 재미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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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걷고 있는데 불쑥 전화벨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전화 올 시간이 아닌데. 그날 이후로, 예고 없이 울리는 전화는 불안하다.


"여보세요?"

"집에 언제 도착해?"

"왜 무슨 일 있어?"


아기가 다쳤나, 무슨 사고라도 났나. 찰나의 순간, 수백 개의 재난 시나리오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레가 아빠 놀라게 해준다고 20분 전부터 침대 이불에 들어가서 안 나온다 땀 뻘뻘 흘리면서 기다려 빨리 와라"

"나 가려면 20분은 걸릴 거 같은데?"


전화를 끊자 방금 전까지 내 머리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퇴사, 이직, 내일의 걱정들. 무겁던 납덩이들이 일순간 연기처럼 흩어졌다. 머릿속은 이불속에 숨어있을 아기로 가득 찼다. 어떻게 리액션을 해줘야 하나. 뭐라고 하며 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어느새 발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가자 안방에서부터 "깔깔"거리는 아기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빠 왔다! 숨어! 숨어!" 어머니의 목소리.

"어라? 이레가 어디 갔지?"


가방을 내려놓고 모른 척 집 안을 몇 번 방황했다. 웃음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자신이 완벽하게 숨었다고 믿고 있었다.


"여깄나보다"


이불을 걷자 땀으로 축축해진 머리카락 아래로 활짝 웃는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얼마나 오래 이 순간을 기다렸을까. 귀여운 자식. 그날 이후 아기는 내가 도착하면 항상 숨는다. 내 침대 혹은 자기의 침대에. 오늘은 또 어떻게 놀라줘야 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릴 때, 쓸데없는 걱정과 스트레스는 사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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