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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피셔 Aug 05. 2018

인간에게 우연이 부재한다면 - 영화 '킬링 디어'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영화들은.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본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들. 송곳니, 더 랍스터, 킬링 디어. 그의 영화들 속 인물들은 우리가 당연하게 갖고 있는 무언가가 부재되어 있다. 송곳니 속 아이들은 집 이외의 ‘세상’이 부재된 상태고, 더 랍스터 속 인물들은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 송곳니를 봤을 때 내가 느낀 건 인간에 대한 ‘냉소’였다. 집을 아이들의 ‘세상’으로 만든 아버지. 부정적인 모든 걸 거세시킨 세상에서 아이들은 어떤 모습일까. 진짜 세상을 향해 나간 아이가 가장 먼제 보게 되는 건?


더 랍스터는 송곳니보다 더 황당한 설정과 극단적인 질문을 던진다. 커플이 되지 못하면 동물이 되는 곳. 오히려 이런 설정이 그의 ‘인간관’을 더 강하게 드러내는 걸까? 나는 이 영화에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생각하는 ‘인간’. 그리고 그 냉소를 더 강하게 느꼈다.  

더 랍스터의 후반부. 떨어진 일기장으로 사랑에 빠졌음이 들통난 근시 여인은 외톨이 리더에 의해 눈이 먼다. 자신이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눈치챈 근시 여인은 리더에게 묻는다.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예요?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잖아요”


영화의 막바지, 눈이 먼 근시 여인을 데리고 외톨이 무리를 탈출한 남자 데이비드. 그는 ‘사랑’을 위해 장님이 되기로 결심한다. 칼을 쥔 채 화장실로 향한 그는 거울 앞에 서지만 눈을 찌르기 전 그의 손은 떨린다. 그는 장님이 되었을까? 근시 여인은 홀로 식당에 앉아 오지 않는 데이비드를 기다린다.

 


반드시 사랑을 찾아야 하는 곳에서 사랑을 찾지 못하고 사랑에 빠져서는 안 되는 외톨이 무리에서 사랑을 찾게 된 데이비드. 강제적인 규율을 만들어 데이비드를 시험하던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영화의 마지막 데이비드에게 절망적인 질문을 한 가지 더 던진다. “지금 너희가 하고 있는 게 ‘사랑’이 맞아?”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시야, 인생을 잃을 상황에 처했을 때 그들의 사랑은 유지될 수 있을까. 근시 여인은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예요?”라고 물었고 데이비드는 거울 앞에 서 손을 떨었다. 그들의 사랑은 완전하지 않았다.


 

“지금 제가 벌이는 이 짓이 그나마 ‘정의’에 제일 가까워요”  


그리고 최근 개봉한 ‘킬링 디어’. 고대 신화를 2018년으로 불러온 듯한 이 영화에는 우연과 정의가 생략되어 있다. 죽어가는 가족. 그런데 왜 죽어가는지에 대한 이유와 과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의 교환. 인간에게, 우리에게 이런 교환은 절대 정의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정의를 말할까.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했을 때, 극단적 상황에 처한 인간의 본능을 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송곳니와 더 랍스터가 무언가가 거세된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킬링 디어는 평범한 가정에 떨어진 어떤 재앙에 관한 이야기다.


스티븐의 가족에게 떨어진 재앙. 남편에게, 아버지에게 죽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내 아내, 아이들 중 한 명을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딜레마. 혹자는 '킬링 디어'가 마틴의 끔찍한 복수극이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마틴은 이들에게 치명적인 재앙을 내리고 재앙을 맞은 스티븐의 가족에게는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명확한 인과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마틴의 아버지가 죽었다면 반드시 스티븐의 가족도 죽어야 한다. 확실하고 동등한 교환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는 가진 모든 걸 잃어야 한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 가족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아버지. 스티븐은 본인이 생각하기에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틴이 접근하며 그는 자신이 명백한 인간임을 스스로 확인한다. 스파게티를 먹는 방법이 다른 사람들과 같아 기분이 나빴다는 마틴. 그 역시 '신'과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선 완벽한 균형, 완벽한 인과관계가 필요함을 알고, 당연하다는 듯 아버지를 죽인 스티븐에게 너의 너의 가족도 죽어야 함을 말한다. "이게 공평한 거예요"라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은 인간이 결국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자신이 만든 특이한 세상 속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완벽한 집, 세상을 선물하려던 아버지는 결국 스스로 모든 걸 망가뜨리고 아이들은 집을 떠난다. 커플이 되려 머문 호텔에서 사랑을 찾지 못해 도망친 남성은 반대로 외톨이 숲에서 사랑을 만나지만 그 사랑조차 완전하지 못함을 깨닫는다. 신의 재앙 속에서 허덕이던 남성은 결국 우연의 손을 빌려 가까스로 신의 균형을 맞춘다.


인간은 절대 완전해질 수 없는 존재다. 신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행복한 삶에도 작은 불행의 씨앗이 머물고 지옥 같은 삶에도 작은 행복의 씨앗이 자란다. 우린 왼쪽에 머물면서도 오른쪽에 머문다. 세상엔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다. 결국 돌아보면 각자의 사연이 있다. 영화 킬링 디어의 재앙이 지독한 이유는 이런 지독한 인과관계가 완전해질 수 없는 인간을 공간에 가득 채워 넣기 때문이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 스티븐이 원인을 제공했으니 반드시 결과 역시 받아들여야 한다. 완벽한 인과 관계. 인간에게 가혹하다.


Written By. 낭만피셔
Photo By. 낭만피셔
Instagram : @romanticpis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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