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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마언니 Jan 13. 2022

모두가 달리는 도로에서 남편은 멈췄다


남편은 배터리 경고등이 들어왔다고 했다.

배터리 간 지 얼마나 됐다고? 하며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사소한 것도 사진을 찍어두는 편이고 요새는 유튜브 한다는 핑계로 동영상도 틈틈이 찍어두는 편인데 정확하게 1년 2개월 전에 배터리 문제로 차량이 그대로 멈춰버렸고 제 발로도 못 가고 등에 업혀 서비스센터에서 배터리 교체를 한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무슨 차량 배터리가 일 년 밖에 못 써? 단단히 화가 났고, 날이 밝는 대로 남편은 서비스센터를 들러야겠다고 했다.


다음날은 큰아이의 등원 날,

이탈리아는 여름방학은 3개월로 제법 긴 것에 반해 겨울방학은 그리 길지 않다.

크리스마스 연휴부터 1월 6일 주헌절까지 대략 열흘 정도 스키 방학 겸 겨울방학시즌이다.

한데 우리 아이는 무려 한 달만의 등원인 것이다.

12월 들어서고 얼마지 않아 같은 반 친구의 코로나 확진 소식, 한 공간에 있었던 만큼 아이들 하나 둘 자체적으로 검사를 했고 예상 밖으로 무증상의 확진자가 속출했다. 그렇게 우리의 12월은 격리와 코로나 검사로 마무리되었고 내일이 대망의 한 달만의 등원인 것이다.

한 달 동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던 터라 오랜만의 등원에 긴장한 건 아이보다 나였다.

해가 어스름해질 때부터 “내일 학교 가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자” 거의 세뇌에 가깝게 되뇌었다.

때문인지 오후 7시가 넘어서자 아이들은 양치를 하고 잠옷을 갈아입고 침대에 누워 잠들기 전 유튜브 시청을 하고 있었는데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저녁은 먹었어?

애들 맥도널드라도 사서 가져다줄까?”


저녁에 공항 미팅이 예약되어있는 남편은 공항으로 가는 도중 집에 들러 아이들 간식을 배달해다 줄 참이었고, 이미 자리에 누운 우린 괜찮다며 배고플 텐데 당신이라도 뭐 좀 먹고 움직이라며 그렇게 통화를 끝마쳤건만 얼마지 않아 남편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왔다.


“결국 배터리 방전인가 봐.. 시동이 안 걸려..

여기로 좀 와 줘..”


누군가 아이들을 잠깐이라도 봐줄 수 있다면..

타국 살이의 최대 단점 중 하나인 손이 부족한 현상은 정말이지 시시때때로 심지어 요즘은 꽤 자주 찾아오는 편이다.

결국은 이곳 이탈리아에서 아무리 둘러보고 또 보아도 우리 가족, 우리 넷 뿐인 우리

잠자리에 이미 누운 아이 둘을 다시금 옷을 갈아입히고 차에 태워 다행히 아직 문이 열린 중국인 운영 만물가게에서 차량 배터리 점프선까지 구입해서 남편에게로 갔다.

시간이 늦어 점프선을 혹여나 구입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남편은 이탈리아 친구에게도 연락을 했고 다행히 그는 점프선도 가지고 있었고 나보다 한 발 먼저 현장에 도착하기도 했다.

모든 상황 종료, 늦은 시간 아이들까지 데리고 얼마나 놀랬냐며 안심시켜주는 친구의 배려가 참 따뜻했다.

덕분이라며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하고 친구는 갔고 남편은 다시 공항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거다.

결국은 불안한 남편 차를 집에 가져다 두고 남편이 내 차를 가져가는 게 안전면에 있어서 다 낫다는 판단으로 집으로 향했다.



남편 차를 앞세우고 그 뒤를 따라가는데 그렇게 크게만 보이던 8인승 벤 차량이 마치 기운 빠진 남편 어깨처럼 연신 작아 보이기도 했다.


역병으로 여행업이 멈춰버린지 이미 오래,

이탈리아에서 투어 가이드하면서 살면 적어도 밥 굶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정말로 이 상황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고 남들이 모두 멍청하다며 손가락질할 때 꿋꿋하게 취득해 둔 NCC (관광객 전용 택시 라이센스) 덕분에 불행 중 다행으로 우버 영업이라도 하며 버틸 수 있는 상황.

그마저도 유럽 관광객도 현저히 줄어든 이 시국에 남편은 불철주야 한국인의 오기로 일해서 버티고 버티는데 이놈의 차량은 만 4년밖에 안됐건만 퍽하면 고장에 늘 발목을 붙잡는 게 원통하고 원통한 거다.

대체 이번엔 또 얼마짜리 수리를 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해져 오는데 앞서가는 남편 차에 비상 깜빡이가 켜졌다.


“파워핸들이 안돼, 실내 등도 다 꺼졌어..”


수화기 너머의 남편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역력했다.

집까지 그리 멀지 않았지만 뒤에서 바라보기에도 곧장이라도 남편 차는 서 버릴 것만 같았다.


안돼.. 안돼.. 조금만 더 버텨줘.. 제발..


비상 깜빡이를 켜고 서행하며 큰 도로를 벗어나 집으로 향하는 길로 들어섰다.

야트막한 언덕 하나를 지나고 커브를 돌아 2-3분여만 더 가면 집인데 남편 차는 결국 도로에 그렇게 서 버렸다.

핸들도 잠겼고 기어도 들어가질 않고 시동도 꺼졌다.

정말이지 조금만 더 지금 이 도로가 아닌 집 근처까지만이라도 갈 수 있게 다시금 내 차를 돌려 배터리 점프를 했고 시동은 걸렸는데 여전히 기어가 들어가질 않아 차는 꼼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항공기는 예상시간보다 훨씬 빨리 도착한다. 다른 친구에게 부탁하려고 해도 그 친구 또한 예약된 일정이 있어 불가한 상황

우리 상황이 아무리 이렇게나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우리 하나 믿고 낯선 공항에 도착하는 여행객을 무엇보다 이건 약속이기에 이 또한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상황


전자시스템 자체가 아예 먹통인지, 문도 잠기질 않고 아무것도 작동이 되지 않는다.

마음은 급하고 꼭 챙겨야 할 서류들만 서둘러 챙겨 도로 한가운데 소매치기며 차량털이범 또한 득실득실한 이 곳에 그야말로 위험천만하게 문도 잠기지 않는 차를 두고 집으로 와 아이들과 나를 서둘러 내려주곤 남편은 그렇게 다시금 공항으로 손님 픽업을 위해 액셀을 밟는다.


도로 위에 다시금 홀로 선 남편.

안쓰럽고 또 안쓰러워 미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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