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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진곤 Nov 15. 2019

미래를 읽으면 돈이 쏟아진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읽다.  

1997년 IMF가 남긴 교훈은?         

1996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명동에는 성탄 전야제로 사람들로 가득했다. 음식점 어디를 가더라도 평소 음식값에 두 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당이나 카페에 있는 사람들 모두 들떠 있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왜냐하면 1996년 12월 26일 논산 훈련소로 입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홍대 근처에서 군대 가야 할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길렀던 머리를 자르고 특히 앞머리를 자를 때, 울컥 눈물이 났지만 참았던 기억이 있다.


1996년 말에 군대를 가고 1997년 IMF 사태가 났다. 군대에 있었기 때문에 IMF로 인해 나에게 큰 피해를 주진 않았다. 다만 매일 아침에 나오던 우유가 나오지 않았으며, 당시 몇만 원이었던 월급이 몇 천 원으로 떨어진 거 외에는 큰 불편함이 없었다. 그 후 오랜만에 휴가를 나왔더니 내가 쓰던 방은 결혼한 둘째 누나와 매형이 쓰고 있었다. 당시 부모님이 다세대나 빌라를 건축해서 파시는 일을 하셨는데, 철근 가격과 금리가 너무 올라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거주 비용과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서 따로 살던 누나가 내 방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길고 긴 터널을 버티고 있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부도가 나는 기업들 얘기와 경제 위기로 자살을 하는 사람들 얘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군대에 있어서 체감이 덜 했지만 당시 사회생활을 했던 사람들에 얘기를 들어보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IMF를 겪지 않았던 세대들을 위해 간단하게 IMF 발생 원인과 세계 유례가 없이 우리나라는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살펴보자.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1988년 즈음에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이른바 3 저호황으로 우리나라는 연 10% 이상의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고도성장이 국내의 혁신적인 기술이 아닌 외부 요인으로 인해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러한 외부 요인은 언제라도 환경이 변하면 금방 위급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내 기업들은 이런 외부요인의 호황이 마치 끝없이 이어질 거라고 생각하듯 방만한 경영을 펼치고 있었다.    

  

우선 저달러와 저금리로 낮은 이자로 달러를 쉽게 차입할 수 있었다. 저유가에 영향으로 수입 원자재를 저 비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금리와 달러가 오르기 시작했고 원유 가격도 오르니 비용이 전보다 더 많이 들어가게 돼서 상품 수익성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은행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은행의 자율적인 결정보다는 국가 주도의 정책 결정 방법으로 인해서 부실한 기업에도 정치인들의 입김으로 대출이 가능한 시대였다. 재무제표는 언제라도 분식회계로 부풀릴 수 있었고, 은행들은 기업이 빚을 잘 갚을 수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정경유착에 의한 대출 증가가 무분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개발 도상국이었던 우리나라는 경제 정책 자체가 국가가 주도하는 정책이었고 그러다 보니 정치와 경제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경쟁력이 없는 기업이라도 정치인들의 입김에 의해 무분별한 대출이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적인 모순이 많았다. 경기가 잘 되고 수출이 증가하면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3저 호황이 끝나자 고비용으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경상수지가 마이너스를 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국내 경쟁력 약화로 수입이 수출보다 많아지고 결국 외화 보유인 달러가 바닥이 나게 된 거다.      


외환보유=달러가 없으니 빚을 갚지 못하게 되고, 국내 신용도는 떨어지고 환율은 오르기 시작했다. 환율이 오르자 수입물가는 더 비싸지고 석유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는 치명타를 입었다. 물론 환율이 오르면 가격 경쟁력에 의한 수출 증가도 있지만 당시 국내 기업들이 자금 부족으로 망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수출로 인한 국가 경쟁력이 회복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래서, 정부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한다. 여기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도 러시아나 그리스처럼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면 어땠을까? 하는 주장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러시아처럼 천연가스가 풍부하지도 않았고, 그리스처럼 유럽연합으로 묶여 있지도 않았다. 만약, 당시 IMF를 신청하지 않았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오랫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베네수엘라처럼 쓰레기통을 뒤지며 먹을 것을 찾아야 하는 고통을 어쩌면 우리나라도 오랫동안 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국민의 단합과 고통 분담으로 우리나라는 빨리 IMF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피해는 너무나 컸다. 많은 기업들이 부도가 났고 또 많은 사람들이 실직을 했다. 개중에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큰돈을 번 사람도 있고, 돈 때문에 자살한 사람도 많았다. 빈부격차는 더 벌어졌으며 비 정규직이 늘어났고, 사회 불평등은 더 가중됐다.      


하지만 IMF로 인한 긍정적인 것도 있었다. IMF에서 요구한 고금리, 관치금융 금지, 투명한 재무제표, 그리고 국가의 최소한의 시장개입으로 우리나라 경제도 전보다는 더 선진국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IMF를 극복하며 우리나라의 신용도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줬다고 치자 그런데 그 돈을 빌린 사람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벌어서 돈을 갚는다면 다음에도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줄 용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돈을 빌려줬는데, 나중에 천천히 갚겠다며 약속을 계속 어기면 다시는 그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 세계인들에게 약속을 철저히 이행했으며, IMF 이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99년 제대를 하고 대학교에 복학했다. 당시 과 친구의 아버님이 무역상이었는데 대금 결제용으로 달러를 많이 보유했는데 달러 가격이 치솟아 막대한 시세차익을 남기고 그 돈으로 반값이 된 부동산을 샀는데 그 부동산도 오르고 있다. 는 내용이었다. 역시 그 시대에도 발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용감하게 미래를 읽고 배팅하면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 는 사실을 깨달았다.       


IMF를 통해서 내가 느낀 몇 가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국내 돈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환율이 급등한다.

 -우리나라의 금융위기가 발생하면 금리가 올라간다.

 -고 달러, 고 금리, 고 유가는 수출로 먹고사는 우리나라에 치명타를 줄 수 있다.

- 따라서 환율 금리 유가는 수시로 체크해서 위기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위기 시에 모든 사람들이 다 힘들지는 않다. 분명히 수혜를 받는 사람들도 있다. 그걸 찾아야 한다.

 -위기 다음은 분명히 기회가 온다. 그 기회까지 살펴볼 주 알아야 진짜 고수다.      


이 글은 2019년 12월 초에 나올 제 책의 일부를 올려 봅니다. 많이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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