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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Jul 05. 2020

결혼, 생활인이 되는 것

연애와 결혼


 휴일 오전, 함께 일했던 후배의 딸 결혼식에 다녀왔다. 입사해서 처음 만났는데 벌써 장성한 딸을 시집보낸단다. 코로나 사태로 요즘 다수가 모이는 결혼식장에 가는 것이 망설여졌지만 그래도 특별히 아끼던 후배라 아침부터 서둘러 정장을 예의 있게 갖추어 입고 예쁘게 마련된 결혼식장에 가서 직접 축하를 전하고 왔다. 코로나 사태가 앞으로의 전망을 살펴보면 일상의 생활이 될 것 같은 불편한 예측을 많이들 쏟아 낸다. 우리 사회도 언젠가부터 지금과 같은 결혼식 문화에 대한 지속 여부를 고민해 오고 있는 분위기가 감지된 지가 오래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시절 큰 일을 당할 때 공동체에서 서로 상부상조하던 그 참뜻을 잃은 지가 오래되었고 가끔은 분별없는 사람들을 위한 허세의 또 다른 표현 방법이 되는 부작용 때문이다.


 아마도 결혼 문화도 여러 다른 선진국들처럼 그렇게 변해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영화 속에서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 대부(1977)에서 1947년 무더운 여름날, 비토 꼴레오네의 호화 저택에서 막내딸 코니의 초호화판 결혼식이 거행되던 장면이 생각날 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 성대하고 화려한 결혼식과는 달리 그녀의 결혼 생활은 화려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결말을 맞고 말았다.



 결혼식을 갈 때마다 늘 생각나는 결혼 축사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누구의 축사였는지는 기억이 없다.


“지금까지 신랑, 신부는 ㅇㅇㅇ때문에 서로 사랑하였으면, 앞으로는 ㅇㅇㅇ때문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첫눈에 반하는 드라마틱한 사랑을 꿈꾼다. 영화 러브 어페어(Love Affair, 1994)에서 처럼.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첫눈에 반해 결혼할 확률은 거의 없다. 첫눈에 반해 결혼하는 위험을 무릅쓰게 할 정도로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갈망하던 그 어떤 것 때문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지라도 결혼해서 함께 살다 보면 그 장점은 일단 내가 챙겨 놓은 내 몫이고 또 다른 것까지 욕심을 부리게 된다. 그럴 때 사랑하고 결혼에 이르게 한 그 장점은 차치하고, 오히려  사랑에 빠져 보이지 않았던 단점이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가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영화 러브 어페어( 1994 )

 그래서 아마도 앞으로는 ㅇㅇㅇ때문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진정한 결혼 생활의 행복한 길로 들어설 수 있다고 축사를 한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고 많이들 얘기를 한다. 함께 살아보면 사실이다. 연애는 정지 내지는 구간 개념이라면 결혼은 흐름과 연속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애는 데이트 약속시간부터 데이트 후 헤어질 때까지의 정지 또는 구간 개념이기 때문에 그 시간에만 잘 준비한 아름다운 모습, 멋진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 의외로 간단하고 쉽다. 하지만 결혼은 함께 24시간 생활하고 이혼하지 않는 이상 계속 연속해서 끊어짐 없이 살아야만 한다. 당연히 힘들고 어렵다. 결혼은 아파치족 인디언들의 결혼 축사 ‘두 사람’과 같다.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하고 동고동락, 함께 노력해야 한다.



두 사람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두 개의 몸이지만
두 사람의 앞에는 오직 하나의 인생만이 있으리라

이제 그대들의 집으로 들어가라
함께 있는 날들 속으로 들어가라
이 대지 위에서 그대들은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영화나 소설을 보면 늘 그 아름다운 연애의 끝은 말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고 여운을 남기며 끝을 맺는다. 그들이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연애를 했을지라도 결혼하고 다시 시작되는 그들의 삶이 반드시 그 연애처럼 행복하게 끝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결혼 이후의 삶을 보여주는 어리석은 짓을 할 리 만무하다. 감독이나 작가를 탓할 필요도 없고 그 상상은 내 몫이고 그 이후의 삶은 그들의 몫이다.



 따라서 연애의 성공이 결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결혼의 실패도 이혼이 아닌 것이다. 그냥 우리들의 삶의 연장선 상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결혼을 한다는 것은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 ‘생활인’이 되는 것이다.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모든 생활을 함께 하는 그 과정을 겪어내는 일이다. 연애 생활이란 말은 없다. 결혼 생활이라고 하는 것처럼 결혼은 지속적인 흐름과 연속성의 개념에서 장점 때문에 행복하고,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처음 만났을 때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하고 사랑한 나의 선택에 어른답게 책임을 지고 함께 살아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단점들이 치명적인 결함임에도 불구하고, 인내하고 불행을 감수하면서 까지 한 번뿐인 인생을 살 필요는 없다. 개선될 희망이 없다면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함께 사는 것도 아니고 헤어진 것도 아닌 그런 상태가 더 문제일 수도 있다. 물론 함께 살면서 새롭게 알게 된 그 단점들이 남편 또는 아내가 의도를 가지고 행한 사기나 기망이 아니라면 나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국가나 법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를 거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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