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ay for Myanmar
덕유산 향적봉에서 바라본 설천봉의 노을 풍경을 노트북의 배경 화면으로 오랫동안 사용했었다. 북한을 제외하면 한라산, 지리산, 설악산 그리고 덕유산(1614m)이 네 번째로 높은 산이다. 모그룹에 입사하고 각사에서 1년 직장생활을 한 동기들 2500명이 어느 해 여름 무주구천동 덕유산에 모여 하계수련대회를 했을 때 덕유산 정상을 등반해 보고는 덕이 많고 너그럽다는 덕유산이 늘 마음속에 있었다.
새해 첫 달의 추운 겨울, 산에 진심인 백패커 지인이 아들과 함께 일박이일로 남덕유산을 거쳐 덕유산 향적봉에 오르고 나서 단톡 방에 상고대가 눈꽃 같은 풍경 사진을 보내왔다. 멋진 풍경과 그의 체력이 너무 부러운 나머지 감탄을 했더니 요즘은 덕유산 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면 20분 정도면 설천봉 정상에 오를 수 있고, 거기서부터 이십 분만 오르면 덕유산 정상의 향적봉에 오를 수 있다는 소중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겨울 눈꽃 등반에는 아이젠이 필수라고 친절하게 안내했다.
얼마 전 경칩을 앞두고 갑자기 아내와 시간을 만들어 덕유산 향적봉을 다녀오기로 결심했다. 마침 남쪽 지방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덕유산 정상에는 분명히 눈이 내릴 것이라고 내다보고 특별히 주말에 곤돌라와 무주 리조트 호텔을 예약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따뜻해서 정상에도 비가 내렸는지 기대했던 상고대의 눈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원래 불한당(땀을 흘리지 않는 무리) 스타일이라서 등산은 회사에서 단합을 핑계로 하는 생계형 등산 말고는 자발적인 등산은 유월 노란 금계국이 필 때면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 정도를 올라가는 것이 전부인 사람이다.
유년 시절에도 비록 시골이지만 나름 귀하게 자란 탓에 특별히 농사일이나 땀 흘리는 노동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내가 먹고사는 게 뭐라고 회사에 입사하고는 이런저런 핑계로 이루어지는 등산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했다.
팀장 때는 등산 마니아 대표이사를 만나서 전국 각지의 명산들을 얼마나 많이 등산했는지 모른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대표님께 많이 감사해하고 있다. 아마도 그때가 아니었으면 내 인생에 어떻게 그런 명산을 등반할 수 있었겠는가. 모든 일이 항상 좋은 것도, 항상 나쁜 것도 없다.
다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주말이라고 차가 막혀서 네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고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따뜻한 카모마일 차를 한잔 마시면서 TV를 보는데 “빼앗긴 미얀마의 봄”이란 프로그램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보면 볼수록 점점 분노가 에스컬레이팅되기 시작했다.
두 가지 관점에서 특히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다. 우선 시민을 보호하는 것이 최우선 임무인 경찰과 군대가 어떻게 그 시민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총을 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두 번째는 “얼마나 더 죽어야 UN이 행동에 나선단 말인가”라는 간절한 호소를 SNS에 올린 대학생이 다음날 시위 현장에서 군인이 쏜 총을 맞고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중장년 세대에게 미얀마 사태는 매우 익숙한 화면이고 낯설지 않은 장면들이었다. 우리나라 또한 남북 분단의 긴장을 정치에 이용하려는 세력들에 의해 지난 정권의 탄핵과정에서 비상계엄령 선포를 계획했다고 하니, 아직도 조금만 긴장을 늦추면 미얀마 사태가 남의 일만은 아닐 듯하다. 그래서 더 생생하게 공감할 수 있었고 더욱 전율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미얀마 민주화 요구 시위 현장에서 총탄에 쓰러진 시민을 소방구급대가 구조해서 병원에 데려다주었다고 구급 소방차를 멈춰 세우고는 모두 내리게 한 뒤, 구급대원 서너 명을 군경들이 둘러싸고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폭행하는 장면은 정말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시위에 나가기 전 자신의 팔뚝에 검은 매직으로 혈액형과 연락처를 적고 있는 미얀마인들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졌다.
남의 일이 아닌 우리도 불과 사십 년 전에 그들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군부독재 시위 현장과 광주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빼앗긴 미얀마의 봄’처럼, 나는 전기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종로학원에 등록할까, 아니면 그나마 간신히 합격한 후기 대학에 그냥 다닐까 고민 끝에 훗날 개봉했던 영화 ‘ 겨울 나그네” 의 도입부처럼 대학생활의 낭만과 축제, 미팅에 대한 설렘에 이끌려서 입학은 했지만 대학 캠퍼스의 보랏빛 라일락 향기가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어느 날 학교 정문 앞을 군인들과 장갑차가 막고 서있었다. 그렇게 설렘을 안고 시작했던 꽃피는 봄날의 대학 생활과 신록의 계절은 전국 대학교 무기한 일제 휴교령으로 끝이 났다.
군부 독재가 우연한(?) 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끝나고 그 ‘서울의 봄’은 왔지만, 대학 입학 후 바로 선배들을 따라서 대학 본관을 점거하고 신군부 정권의 학생군사훈련 입소를 거부하고 반대 데모를 시작했다. 싸늘한 복도에서 며칠밤을 세우고 집에 옷 갈아입으려고 잠깐 들렀다가 아들의 행방불명 후 노심초사하시던 부모님께 붙들려서 그 길로 바로 택시를 타고 남한산성 밑에 있는 학생 종합군사학교로 뒤늦게 혼자서 입소를 했다.
그렇게 학생 군사훈련을 마치고 나온 나는 더 이상 면목이 없어 그들의 시위 현장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아니, 한편으로는 국가에 헌신하고 있던 아버지의 당부와 위협받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내 스스로 현실을 외면하고 서울을 떠났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속세를 떠나 비상한 각오를 하고 재수를 하고 있던 친구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군부독재와 첨예하게 맞서던 시위 현장을 떠나 산 좋고 물 좋은 백담사에서 잡일을 하면서 가을 개학 때까지 생활했다. 공짜 공양을 위해서 밭도 갈고 김도 매고 마당도 쓸었다. 또한 스님의 지시로 가끔은 설악산 대청봉 밑에 있는 봉정암까지 새벽에 주먹밥을 싸서 기왓장을 배낭에 메고 왕복하는 당일치기 속도전의 등반을 하기도 했다.
새벽 6시에 출발해서 기왓장 한 장을 배달하고 다시 백담사로 돌아오면 오후 다섯 시쯤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기가 제일 세다는 봉정암 진신사리탑 너럭바위에서 점심 공양후 가끔은 짧은 낮잠을 자기도 했다. 먼 훗날, 자유 대한민국을 위해 구국의 결단을 내렸다던 그분은 내가 머물렀던 그 백담사에서 혹독한 겨울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지금까지도 그때를 생각하면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하는 모습처럼, 군부 독재에 맞서 함께 연대하고 투쟁하던 그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과 함께 할 말이 없다. 지금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민주화되고 언론의 자유가 꽃피고 있는 서울의 봄을 맞이할 때면 민주화 투쟁에 목숨을 바친 그들에게 항상 마음의 빚을 가지고 살고 있다. 그리고 사회와 이웃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몇 년 전에 헤밍웨이가 잠시 살았고 사랑했던 도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란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의 배경이 되었다는 론다(Ronda)를 다녀왔다. 스페인 내전에서 파시즘 타도를 위해 금전적 후원은 물론 특파원으로 직접 참가했던 헤밍웨이처럼 나도 미얀마를 위해 기도만 할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어떤 다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찾아보아야겠다.
미얀마의 수도에 있는 한국대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나도 모르게 미얀마 군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함께 눈가가 흐려진다. 미얀마 사태후 한국 정부가 미얀마에 최루탄 수출을 중지하고,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미얀마인들에게 정세 안정 때까지 특별체류 연장을 배려해준다고 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
‘죽음에 임해서의 기도’, 존 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