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슴 설레며 당신을 기다렸던 그 길을 다시 걷고 싶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

by 봄날


하루를 마감하는 휴일 늦은 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집으로 가는 길’(2000, 장이모우 감독)이라는 영화를 발견하고 보기 시작했다. 화면 가득히 늦가을의 억새가 흐드러지게 핀 언덕과 눈을 뗄 수 없는 영상에 나도 모르게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얼핏 동명의 한국 영화로 착각했지만 금방 세계적인 중국의 여배우 장쯔이를 보고 다른 영화임을 알아차리고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다.


도시로 나가 사업을 하던 루오 유셍은 평생을 한 곳에서 교사로 지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는 전통 장례를 고집하는 어머니의 부탁에 고심하다 부모님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회상한다. 처음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잠 못 이루던 수많은 밤, 그와 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하는 설렘으로 시간을 보내던 그 아름다운 시절.


출처, 인터넷 이미지


그가 선물해준 머리핀을 찾으러 며칠을 자신이 뛰어갔던 그 길을 찾아다니던 그녀는 자작나무 울타리 밑에서 반짝이는 빨간 머리핀을 발견한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눈발 흩날리는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은 '죽은 자가 집으로 오는 길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는 의미와 함께 죽은 자와 산자의 아름다운 여운을 선사한다.


장이모우 감독은 일반적이지 않게 오히려 현재의 시간은 흑백으로, 과거 부모님의 사랑 얘기는 컬러를 입힌 필름으로 보여준다. 가슴 시린 첫사랑의 이야기와 그 시절을 담아내는 풍경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을 자아낸다. 화면 가득히 담아내는 끝없는 벌판에 눈이 내려 쌓인 길, 겨울의 하얀 자작나무 숲길, 노란 단풍이 든 늦가을 풍경이 마치 내가 그 길에 서있는 듯하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2000,장이모우감독)


한동안 잊고 살았던 그리움, 설렘, 순수함이라는 아름다운 말들을 다시 우리 앞에 한가득 내려놓고는 가보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는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그 하나하나의 말들이 가지는 의미를 우리에게 되새김질시켜준다.


90년대 중반, 유홍준 선생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사무치게 그립다 “라는 말을 곱씹었던 기억이 있다. 바쁜 직장생활 속에서 몇 년을 계획만 하다 어느 여름휴가 때, 무슨 일이었는지 기억엔 없지만 함께 갈 수 없었던 아내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 당일로 영주에 있는 그 부석사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읽고 늘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무량수전, 그 옆의 부석과 돌배나무, 그리고 안양루에 올라 겹겹이 쌓인 소백산맥 줄기를 내려다보고는 가슴이 벅차 올라왔던 추억이 있다. 관념적으로만 이해하던 그 ‘사무치게 그립다 ‘는 말을 또 한 번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출처, 인터넷 이미지


어떤 노력이 없어도 나이를 먹으면 마음은 더 너그러워지고 현명해져서 어린아이처럼 순수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런 노력 없이는 그저 먹을 수 있는 건 나이밖에 없다는 사실도 새삼 알게 되었다. 영화 ‘집으로 가는 길’, 바쁘게 살아가는 현실의 삶 속에서 잠깐 잊고 살았던 사무치는 그리움, 가슴 뛰는 설렘, 잃어버린 순수함을 기억하고 추억하고 싶다면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반드시 한 번쯤 시간을 내야 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