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위로

by 봄날


장맛비 소리가 요란한 주말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나 우연히 영화채널에서 ‘애월’(2019, 감독 박철우)이란 영화를 보았다. 기승전결의 갈등 구조에 크게 얽매이지 않으면서 주인공이 제주도에서 이웃들과 함께 보내는 잔잔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영화 애월은 오토바이로 전국 일주를 하던 수현이 제주도 애월에서 비운의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사고 이후, 수현의 연인 소월은 그리움에 잠겨 애월을 떠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



둘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철이는 수현이 죽기 전 보낸 편지를 3년이 지나서 받게 되고 무작정 애월로 떠난다. 소월을 찾아와 그녀의 집에 잠시 머물게 되는 철이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애월에서의 소소한 일상을 보내고, 철이와 소월은 그렇게 함께 지내며 죽은 수현에 대한 그리움을 각자의 방식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이야기였다.


애월, 새별오름

오래전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당일로 제주도에 내려가서 많이 위로받았던 하루가 생각났다. 해외 비즈니스가 중심이었던 우리 회사도 그 IMF 태풍을 피해 가지 못하고 인력과 사업 구조조정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며칠 전 함께 밀라노 출장을 다녀왔던 후배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어떻게 그 사실을 말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큰길 도로 옆 주유소에서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크고 작은 차들이 주유를 하고 무심하게 떠나고 다시 들어가곤 했다.


가파도


사실 어제까지 함께 일했던 동료와의 생이별에 슬퍼할 겨를도 없었고 구조조정의 칼바람에 살아남느냐 떠나느냐 생존 그 자체가 문제였다. 그때는 TV만 틀면 많은 대기업들이 도산하고 구조조정으로 회사를 떠나는 많은 금융회사 직원들, 특히 은행원들의 눈물의 호소가 잇따를 때였다.


늘 그렇듯 진실은 항상 디테일에 숨어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거리 풍경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 속의 개개인의 삶의 디테일을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외환위기의 소용돌이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산 일출봉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외환위기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휴일도 없이 연일 출근해서 대책을 마련하곤 했었다. 그리고 어느 주말에는 출근해서 문득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때쯤 나는 ‘제주도의 푸른 밤’(최성원)을 들으며 그 황당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했었다. 한 시간의 비행 후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차량을 렌트하고 한라산을 관통해서 제주도 성산일출봉에 올랐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매우 자유로웠고, 우울한 현실을 도피해 오롯이 나 자신을 위해 걷고 또 올랐다. 그리고 성산 일출봉 정상에서 파노라마 같은 성산 풍경을 바라보면서 많이 위로받았다.


지미봉


어떤 말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지만 일출봉을 오르고 주변 성산 해변을 산책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슬픈 현실에서 해방되었다. 그 전에 일출봉을 올랐을 땐 오로지 정상만 보였지만, 다시 내려가는 길에 군락을 이루고 피어있던 들꽃, 자주괴불주머니 꽃이 보였다.


그날 제주에서 올라와 바로 ‘한국의 야생화’(김태정) 도감을 사고 계절마다 피는 형형 색깔의 우리나라 들꽃이름을 외우며 힘든 시간을 버텼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묵묵히 견뎌내는 것이다.


오조포구


잘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의 슬픔이나 아픔을 함부로 위로해서는 안된다. 위로는 말이 아닌 눈빛으로, 조용한 기다림으로 하는 것이다. 섣불리 잘못 위로하면 본의 아니게 2차 가해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격의 없는 인간은 존경심을 잃고, 너그러운 인간은 무시당하고, 쓸데없이 열의를 보이는 인간은 보기 좋은 이용물이 된다.”(발자크)는 말이 있다.



언젠가 ‘자연의 철학자들’(KBS)이란 프로그램을 보았다. 어느 여성 산악인이 함께 등반하곤 했던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제일 괴로웠던 순간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게 되는 위로의 말이었다고 했다.


그 후 지리산에 들어가 살며 혼자 산을 오르고 산책하면서 위로받고 7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그 아들 얘기를 입밖에 꺼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분명 괜찮을 리가 없는 사람인데 별일 없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가 얼마나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우도


때로는 세월이 약이 될 때가 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위로해 주는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누군가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때가 있다.


사실, 누군가의 슬픔이나 아픔을 위로해 주는 사람보다는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해 주는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나의 기쁜 일을 자신의 일처럼 좋아해 주고, 나보다 더 기뻐해 주는 사람이 진짜 귀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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