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맛도, 사람에 대한 마음도 한결같아야 한다

친구

by 봄날


어제부터 길었던 봄 가뭄이 끝나고 초여름 제주 남쪽에서 시작된 장맛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하루 전 대학 친구들과 함께 오랜만에 운동을 했다. 코로나로부터 대부분 일상으로 돌아오고 난 후 이래저래 많은 약속 중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렌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브런치를 챙겨 먹고는 아내에게 오후에 남한산성에 산책을 가자고 제안했다. 정오를 넘기면서 곧 소나기 같은 장맛비가 내렸고 아내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난 네스프레소 커피를 내려 마시면서 음소거를 해놓고 한국 오픈 라이브 중계방송을 보았다.



그리고, 아내가 요청했던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한 천재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유튜브에서 찾아 블루투스로 연결된 스피커로 들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이 곡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뒤늦게 클래식에 입문한 나는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가 피아노 음악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사실이 아닌데도, 나의 감정선이 흔들릴 수 없었던 이유가 트위터 타임라인을 둘러보면서 집중을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철없는 트위터리안이 장마가 시작되면서 베란다에 열어놓은 빨래가 잘 마르지 않을까 봐 걱정이라는 글에 누가 댓글을 달았다.



농부들이나 온 국민이 긴 가뭄에 바싹 타들어가던 마음을 풀어주는 단비에 그게 할 소리냐고 했다. 건조기가 없으면 빨래는 그냥 빨래방에 가서 하면 되는 간단한 문제라고 말했다. 그 트위터리안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 앞에서 진실을 외면하기 마련이다.


부끄럽지만 심한 가뭄에도 지난주, 나 또한 이틀 전 운동 약속 때문에 기상예보보다 하루 빨리 장맛비가 내릴까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힘찬 장맛비 소리에 하늘은 낮고 어둑하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났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들곤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우리의 기억이란 것도 깡통에 든 통조림처럼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유통기한은 없다.


봄, 여름, 가을, 계절마다 한 번씩 만나 운동하고 시답잖은 이야기, 쓸데없는 소리, 별것도 아닌 걸로 시시덕거리는 친구들이지만 그냥 좋다. 어느 심리학자가 말했다. 친구란 웃고 떠들고 실없는 얘기하는 게 진짜 친구란다. 힘들고 마음에 담고 있는 얘기는 전문가와 해야지 친구랑 하면 둘 다 망한다고 했다.


트리니티

가깝고 오래 사귄 사람, 인간적으로 서로 존중하는 관계의 사람을 가리킨다는 친구에 대한 정의보다 그 말이 사실에 더 가깝다. 매일 마시는 커피 맛도, 사람에 대한 마음도 한결같아야 한다. 친구는 같이 놀고 싶은 사람이고, 사랑하는 사람은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다. 어제는 비가 내렸고 하루 종일 아내와 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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