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날 Sep 23. 2022

바보들은 꼭 직접 겪어봐야 안다, 상상력이 없으니까

패션 화보


 지난여름 무더위가 마지막 맹위를 떨치던 날, 뜬금없이 아내에게 “앞으로 난 당신의 시리(Siri)가 될게요”라고 말했다. 왜 그랬는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나중에 정신을 차리고는 더위를 먹었다고 생각했다. 그 후 아내는 “커피가 먹고 싶어”, “ 한강에 밤 산책 가고 싶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틀어줘”등등 알차게 명령을 내린다.


 인간 시리로서 계속 명령어를 수행하다 보니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급기야 아내의 요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아내가 컴플레인을 했다. 무슨 시리가 감정이 있느냐며 시리는 그저 오로지 ‘실행’ 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업그레이드된 AI 시리라며 우겼다.



 결국 간단히 저녁을 먹고 오랜만에 한강고수부지로 밤 산책을 나섰다. 추석이 지나고 이제 제법 밤바람이 사뭇 달라졌다.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따뜻한 물로 샤워할 수밖에 없다. 새롭게 조성된 한강 산책로를 따라 느린 걸음으로 산책을 하며 며칠간 인간 시리를 수행하던 설움을 갚아줄 묘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나고자란 아내는 나무나 꽃 이름에 매우 약하다. 하지만 나는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덕분이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함께 많은 꽃과 나무의 이름을 알고 있다. 산책을 할 때마다 아내에게 꽃과 나무 이름을 가르쳐주며 걷는다. 그리고 또한 바로바로 가르쳐준 나무나 꽃을 다시 만났을 때 즉시 쪽지 시험 같은 구두시험을 치르곤 한다. 일상에서 내가 아내보다 뛰어난 유일한 핵심 역량이다.


잠실대교


 작년 가을부터 아내는 더 이상 올림픽공원 산책 가기를 거부했다. 집에서 서운한 일을 당하면 산책을 유도해 아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구별에 대한 구두시험을 보고 엄청 구박했기 때문이었다. 잠실 쪽 한강 고수부지 산책로에는 유난히 뽕나무를 많이 심어 놓았다. 나는 여러 번 아내에게 뽕나무를 가르쳐주었다. 드디어 산책 중 뽕나무를 발견하고 아내에게 무슨 나무냐고 물었다.



 아내는 바로 대답을 못하고 오히려 내게 무슨 나무냐고 되물었다. 계획대로 뽕나무라고 말해주고 열 번도 더 가르쳐준 것 같은데 왜 모르느냐고 반문했다. 아내는 억울하다는 듯이 뽕나무를 가르쳐준 적이 없다고 딱 잡아뗐다. 그래서 지난여름 고창에 여행 갔을 때 내가 뽕나무에서 직접 오디를 따주어 잘 먹지 않았느냐며 되물었다. 아내는 그제야 수긍을 했고, 그건 뽕나무가 아니라 오디나무가 아니냐며 우겼지만 별 소용없었다.


뽕나무


  한강 고수 부지에 잘 조성된 산책로의 조경을 보고 우리나라가 선진국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한 나라의 문화 수준을 알아보려면  그들이 동식물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들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관리하는 수준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최근에 우리나라도 청와대에서 패션 화보를 찍었던 일로 문화재청이 많은 비난을 받고 있다.


  나름 한복 홍보를 위한 행사였다고는 하지만 한심한 역사인식과 함께 국격을 깎아내리는 품위 없는 행사였다. 그 패션 화보는 공간과 의상의 부조화는 물론이고, 그 화보를 보는 순간 왠지 모욕당하는 느낌이 들었다. 일제가 창경궁을 동식물원으로 만들고 우리나라의 국격과 나라의 혼을 무너뜨렸던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행히 문화재청도 그 잘못을 인정하고 바로 잡겠다고 했고, 그 패션 화보를 찍었던 패션지 또한 자사 및 소셜미디어에서 그 화보를 모두 내렸다고 한다.


올림픽대교


 회사 일을 하다 보면 일 못하는 조직이 외부로 드러날 때가 무슨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할 때다. 행사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는 난해한 슬로건, 각종 인쇄물들의 맞춤법 및 오탈자, 어지럽고 복잡한 동선, 행사 분위기를 깨는 장소, 게스트 섭외 등등. 그 행사가 크고 작든 간에 그 안에서 결국 조직의 갈등과 잡음이 외부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또한, 오래전 잘 나가던 유명 탤런트가 일본군 위안부 느낌이 나는 패션 화보를 찍고 엄청난 비난과 함께 내리막길을 걸었던 일이 있었다. 언제나 왕따보다 무서운 게 오버다. 선을 넘은 것이다. 한심한 조직이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꼭 직접 겪어봐야 안다. 시적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라 일이야 말해서 무엇할까만은 쇼를 하든, 행사를 하든 일사불란한 조직은 물론이고, 중요한 것은 콘텐츠와 실력 그리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

이전 27화 삶이란 무엇인가 끊임없이 흘러 보내는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