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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Dec 15. 2022

가진게 있어야 비울 수 있고, 힘도 있어야 뺄 수 있다

세편의 영화



 트위터를 둘러보고 있던 아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2022, 김세인 감독)라는 영화로 둘만 함께 사는 모녀의 갈등을 소재로 한 영화였다. 영화예매를 하려고 보니 하루 한 번만 상영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바로 예매를 하고 집 앞 영화관으로 향했다.


 상영관에는 정확히 일곱 명이 앉아 있었다. 어떤 갈등의 전환 모멘텀이 없이 영화가 끝날 때까지 두모녀의 갈등이 계속 이어졌기에 보는 내내 불편했지만 한 장면도 놓칠 수가 없었다. 아내는 영화 중간중간 나를 쳐다보곤 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졸고 있지 않나 확인하는 것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집에 걸어오면서 영화를 본 소감을 서로 얘기했다. 나는 딸의 입장에 서있었고 아내는 엄마의 입장에 서있었다. 나는 세상을 선택해 태어나지 않은 딸의 입장에서 양육은 생색낼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었고, 아내는 혼자 어렵게 일하면서 이십 대 후반이 될 때까지 자신을 양육해온 엄마를 이젠 이해할 때도 되었건만 성장하지 못한 딸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는 끝내 어떤 결론을 내거나 어느 편에서도 관객을 설득하지 않고 그렇게 끝이 났다. 며칠 후, 주말 오후에 아내가 또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말했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를 보고 난 후 가져온 영화 팸플릿, ‘탑’(2022, 홍상수 감독)이었고 바로 예약을 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가까운 쇼핑몰에 크리스마스 마켓이 열렸고 주말이라 사람들이 많이 붐비고 있었다.



 영화감독으로서 홍상수를 좋아한다. 그의 시끄러웠던 일들은 개인사일 뿐이고 그의 영화를 제외하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를 옹호하지도 않지만 함부로 얘기하지도 않는다. 한 개인의 사생활에 관심 가질 이유도 없다. 그의 영화를 보는 내내, 또 아내는 중간중간 나를 쳐다본다. 어둠 속에서 둘이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함께 웃는다.


 홍상수 감독스러움,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듯한 장면과 배우들의 느릿느릿 하지만 정확한 딕션 덕분에 귀에 꽂히는 대사들 때문이다. 편안한 일상처럼 힘을 뺀 그의 영화가 좋다. 가진 게 있어야 비울 수 있고, 힘도 있어야 뺄 수 있는 거다. 근래만 해도 그의 영화가 72회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71회 은곰상 감독상, 70회 은곰상 각본상을 받아도 언론에서 제대로 다루지도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용머리해안, 제주도


 다음날 휴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내친김에 홍상수 감독의 베를린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한 영화, 쉽고 따뜻하고 모나지 않은 그의 고백 같은 영화, ‘소설가의 영화’를 케이블 TV에서 찾아 휴일 대청소를 하자는 아내를 불러 앉히고 함께 보았다.


 그 ‘소설가의 영화’ 속에서 영화감독 일을 하는 박 감독(권해효)과 그의 아내, 소설가 준희(이혜영) 셋이 가까운 공원을 산책하던 중, 우연히 영화배우 길수(김민희)를 만나고 박 감독은 길수를 보고 너무 아깝다고 말한다. 그 말은 들은 소설가 준희는 박 감독에게 이렇게 따지듯이 말한다.



“이런 배우님이 연기를 안 한다니 너무 아깝네요. “


“아니, 뭐가 아까워요? 배우님도 성인이고 다 자기가 선택하는 건데?  애 취급하는 거예요?

뭐가 아까워요?

초등학생도 아니고.

본인이 하고 싶은 걸 잘하고 있는데...

혹시, 이 분 인생을

더 잘 살 수 있다는 거예요?

누구나 자기가 실현하고 싶은 게

있는 거라고요.

아깝다니!!

자기들 인생이나 아끼며 살지.”


하고 소리치듯 따지는 소설가 준희의 말에 기분 상한 박 감독과 그의 아내는 산책을 마치고 돌아선다.



 영화 속에서 수화를 배운다는 아르바이트생을 따라 하며 소설가 준희가 동어 반복하는 대사, “날은 밝지만 곧 저문다. 날이 좋을 때 실컷 다녀보자"의 수화를 아내와 함께 따라 해 보면서 영화를 보았다. 영화 속 대사에 나오는 ’카리스마‘란 말을 듣고 딸아이가 고3일 때 담임 선생님께 진학상담을 다녀오며 있었던 일화를 말해준다. 햇볕 좋은 늦가을, 서울 근교를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학교에 들린 아내는 쟝 폴 고티에 선글라스와 세일 때 산 아르마니 가죽 자킷을 그대로 입고 갔다고 했다.



 아내는 담임 선생님과 진학상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친구들과 함께 있던 딸아이를 발견하고 쿨하게 손 한번 흔들어주고 왔다고 말했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온 딸아이가  그때 함께 있던 친구들이 “우와, 너네 엄마 카리스마 장난 아니다, 포스가 대단한데”라고 말했다며 아내에게 전해주었다고 했다.


 사실, 아내는 도수가 들어간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벗을 수 없었을 뿐이었다고 말했다. 한 번밖에 못 본 아내의 아우라를 말한 딸아이 친구들의 인식처럼,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얘기할 때가 있다. 특히, 셀럽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일반 사람들 아니, 자기 자신보다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키곤 한다.



 나도 아내와 함께 삼십 년을 넘게 살았지만 아직도 아내에 대해서 정확히 모르는 것들이 많다. 물론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두 속속들이 다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다 알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지만 끊임없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계속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고, 아내의 취향과 스타일을 존중하니까 매번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서로를 다 안다고 쉽게 단정하니까 죽을 때까지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서로를 제대로 알지 못하니 이해할 수 없고, 이해를 하지 못하니 서로 미워하고 다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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