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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May 11. 2023

힘들고 지쳤다는 건 많이 노력했다는 증거니까

삐딱하게


 토요일 오후에 배송 온 천명관 작가의 장편소설, ’고래‘(문학동네)를 주말 오후 내내 읽었다. 뉴스에서 영국의 부커상 후보작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구매했다. 작가의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그의 작품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고 어떤 소설이길래 부커상 후보작이 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노벨문학상, 프랑스 공쿠르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부커상 심사위원단의 말에 따르면 ‘고래'에 대해 "한국의 외딴 마을을 배경으로 한 '고래'는 세 인물의 삶을 따라간다"며 "전근대 사회에서 탈근대 사회로의 급속한 전환 과정에서 한국이 겪은 변화를 재조명한 풍자적 소설"이라고 평했다고 한다.


춘당지, 창경궁


 영화 ’극한 직업‘의 슬로건처럼 “지금까지 이런 소설은 없었다”라고 했다니 지적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의 이야기 구조를 따라 단숨에 읽어나가면서 주말 오후였지만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이 소설을 읽지 못했던  스스로의 무관심과 무지함에 대해 반성했고 앞으로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느꼈다.


후원, 창덕궁


 지금까지 이런 소설이 없었다는 극찬처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어떻게 이런 풍요로운 구라를 풀어낼 수 있는지 그 창작의 법칙에 감탄했다. 주말을 혼자 그렇게 보낸 미안함에 휴일 오전에는  아내가 올해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보고 싶어 했던 창덕궁 뒤뜰의 모란을 보기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아내는 특별히 모든  성(castle)과 서울의 궁(palace)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한다.


하얀 모란, 창덕궁


 이젠 아내가 전생에 아마도 성으로 둘러싸인 궁궐에서 옛 주인의 가족 구성원중 한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오면서 틈틈이 가스라이팅을 당한 탓도 있지만 성곽이나 서울의 5대 궁궐을 산책할 때면 나와는 달리 궁에 걸맞은 기품 있는 모습과 말투,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모란꽃을 특별히 좋아하는 것을 보고 점점 더 그렇게 믿게 되었다.


부용지, 후원


 하지만, 또 궁궐의 넓은 마당보다는 회랑을 걷고 싶어 하는 모습에서는 사극에서 회랑을 총총이 뛰듯이 걷던 많은 무수리들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감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창덕궁의 뒤뜰이나 후원의 모란을 보고 마치 오랜 옛집에 온듯한 아내의 품위 있는 모습에서 불경스러운 생각을 떠올렸던 자신을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mbc)의 호위무사에 비유하며 나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탓으로 돌렸다.


회랑, 창덕궁


 또한, 전생에 그런 고귀한 분이 온갖 부귀와 영화를 마다하고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평사원에게 시집와서 자신의 꿈을 접고 삼십 년이 훌쩍 넘게 독박 육아와 독박 가사노동의 헌신을 해왔으니 이제 내가 그 은혜를 갚을 시간이다.


 남자는 철들면 인생이 재미없어진다는데 요즘은 나이를 먹는지 자꾸만 철이 든다. 나이 들어가면서 건강 생각도 해야 하지만 가끔은 이런 건강한 생각도 하고 살아야 값나가게 살진 못해도 후지게 살지 않을 수 있다.


창경궁 전경


 창덕궁과 후원(비원), 또한 함께 연결된 창경궁까지 산책하고 마무리는 차를 세워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까지 걸어오면서 그 옆 블루보틀에서 맛있는 커피를 대접받고 산책을 끝냈다. 그리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대형버스에 부착된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는 글을 보고 동양학을 전공한 아내 앞에서 “덕을 베풀면 외롭지 아니하고 반드시 함께하는 이웃이 있다”며 뜻풀이를 하는 오버를 해서 아쉬움을 남겼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아내가 ‘삐딱하게’ 말했다. 이제 세상은 변했고 맥락 없이 마냥 그렇게 남들에게 덕을 베풀고 배려만 하다가는 무시당하고 호구되기 십상이라며 평소 아내의 어법에 맞지 않는 말을 했다. 나는 아내에게 힘들고 지쳤다는 건 많이 노력했다는 증거니까, 이제 시댁이든 누구에게든 궁궐의 옛 주인처럼 남을 배려할 필요 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그 뒷감당은 오롯이 내가 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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