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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Aug 24. 2023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페미사이드(femicide)


 요즘은 뉴스보기가 두렵다. 물론 몇 해 전부터 뉴스를 안 보고 가능하면 교양, 오락프로그램을 보면서 한 번이라도 더 웃고 시대의 트렌드를 이해하는 게 이득이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시사이슈에 뒤떨어질까 저녁뉴스는 챙겨보고 있다.


 또한, 팩트체크가 가능하고 다양한 사람들 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트위터를 활용한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신림역과 서현역 무차별 칼부림 난동에 큰 충격을 받은 지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백주 대낮에 시내 등산로에서 방학중 출근하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고 죽는 일이 발생했다.




“한국이 세계에서 치안이 제일 잘 유지되고,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데 요즘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


“아니, 스타벅스에 노트북 꼽아놓고 핸드폰 두고 화장실 다녀와도 되는 나라면 그런 거 아닌가요?”


“여기저기 감시카메라가 촘촘히 박혀있으니 그런 거예요, 당신이 진짜 무슨 국뽕에 빠진 꼰대예요? “



피오르 가는 길. Norway


 옆에 앉아 트위터를 둘러보고 있던 아내가 핀잔을 준다. 늘 내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많은 특권을 누리면서도, 문제는 남자들은 그 특권을 누리는 것조차 알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분노해 왔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기도 했지만, 사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나마 그 사실을 조금 인식하게 되었고 습관이 된 사고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다.


 해외 패키지여행을 갈 때면 늘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게 얼마나 큰 특권인지 알게 된다. 여행을 할 때마다 버스를 타고 새로운 관광지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다. 그때마다 인솔자들이 제일 먼저 안내하는 것이 화장실 이용에 관한 것이다. 요의를 느끼든 못 느끼든 일단 관광지 공중화장실을 먼저 이용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버스를 타고 다음 관광지로 이동하는 시간에 화장실이 급하면 정말 민폐를 끼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여행지가 유럽 등 선진국이라면 더더욱 마땅한 화장실을 쉽게 찾을 수도 없거니와 그 여행에서 지옥을 맛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때마다 느낄 수 있는 남자의 특권이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그 프로세스가 여성보다는 남성이 현저히 짧음에도 불구하고 비례에 맞지 않는 여성용 화장실 숫자와 그 프로세스 때문에 늘 여성화장실 앞에는 관광지마다 최소 대기줄이 10~2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 화장실은 기껏해야 서너 명이고 대기 줄 없이 이용하고 유유히 걸어 나올 때마다 마주치는 여성관광객들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을 온몸으로 시전하고 있었다.



 한 번은 화장실을 이용하고 그 여성들을 지나치면서 미안한 마음에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도 아닌데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려 죄송합니다”라고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다행히 그 말을 들었던 여성분들이 미소로서 화답 한 걸 보면 밉상으로 보이지는 않았던 모양이라 안심했다. 그처럼 우리 사회에서 평생 남자로만 살아온 사람들은 그들이 누리는 엄청난 특권조차 인식하지 못해도 되는 너무 많은 특권을 누리며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역지사지, 남자와 여자, 입장을 한 번이라도 바꾸어놓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성인이라면  오랜 세월 세습되어 온 가부장제도하에서 살아온 삶을 한 번쯤은 다시 생각해 볼 테지만, 그렇질 못하니 꼰대 소리를 듣고, 꼰대 같은 소리를 하는 것이다. 생각 없이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양성평등화된 선진국을 살고 있는 MZ세대들은 조금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지만 요즘의 사회문제 뉴스를 보면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그 불평등과 매일매일 뉴스에서 보고 듣는 여성을 상대로 한 많은 사건들만 보아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안전에 대한 인식은 거의 운에 맡기는 복불복,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살아있는 게 아니라 그냥 운이 좋아 생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난번 서현역 한복판에서 벌어진 무차별 칼부림난동에서처럼 대부분의 희생자는 약한 여성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내 또한 아파트 엘베에서 야구모자나 검은 마스크를 쓴 남자를 보면 함께 타지 않고 다음 엘베를 기다린다고 했다.



 그 칼부림 뉴스를 보고 인터넷쇼핑몰에서 여성 호신용 최루가스분사기를 주문했는데 그마저도 주문이 폭주해 물량이 부족한 탓에 취소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다시 또 다른 아이템으로 주문하니 이주만에 겨우 도착했다. 하지만, 그 위급한 상황에서 정말 무슨 소용일까 싶고, 오히려 더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아이에게 건네주지도 못하고 있다. 요즘 같으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있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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