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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날 Oct 15. 2024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가을 안부


회사 생활을 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일본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생활’이라는 시가 지치고 힘들 때 많은 위로가 되었고 버틸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땐 매사 걱정이 많았고 나의 최선만이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었다.


생활


기분 좋게 일을 마친 후

한 잔의 차를 마신다


차의 거품에

어여쁜 나의 얼굴이

한없이 무수히

비치어 있구나


어떻게든, 된다.


다자이 오사무


 이제 바쁜 삶이 지나가고 여유가 생기면서 그 다자이 오사무라는 작가가 궁금해졌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1948년, 도쿄대를 졸업하고 소설가로서 세상의 최고 평판을 얻었던 그해, 그동안 네 번의 자살시도와 함께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을 시도해 성공하고 말았다.


핑크뮬리, 태안 청산수목원


39세로 생을 마감한 그가 남긴 많은 소설 중, 오래전 특히 제목이 근사했던 소설, ’인간실격‘을 사서 읽었고 ‘인간다움‘이라는 화두로 많은 생각을 했다. 또한, 몇 년 전, TV드라마 ‘인간실격’(2021)을 좋아했다. 그 소설과 이름만 같았을 뿐 그 내용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주인공 부정(전도연)의 존재의 본질과 고립된 개인의 고뇌를 다뤘다는 점에선 같은 주제였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지만, 그 소설과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슬럼프가 올 수밖에 없다. 매사 최선을 다한다면 사람도 그렇지만 기계라 할지라도 쉼 없이 계속 가동을 하면 지속가능할 수가 없다. 도움이 필요할 땐 주변사람이 아닌 전문가의 상담이 우선이다.


 세계적인 프로 축구선수들도 자신에게 공이 넘어올 때는 골문을 향해 한 마리 사자처럼 달려들고 최선을 다할 뿐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비효율적인 움직임을 삼가고 계속 뛰어다니지는 않는다. 체력을 안배하며 시야를 넓게 가지고, 공이 날아올 만한 곳으로 끊임없이 위치를 이동할 뿐이다.



 나 역시도 회사일만큼은 나름 끊임없이 최선을 다했고,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다. 그리고, 회사생활의 마지막 최고 정점에 올랐다. 인생의 목표를 달성하면 행복할 것 같았지만 한동안 허탈하고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 삶의 비빌 언덕이 되어준 고마운 회사였으니 마지막까지 최선의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렇게 회사생활을 마치고, 갈망했던 자유를 얻었다. 더 이상 새로운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는다. 인생은 어차피 무한반복의 삶이니까.


팜파스 그라스(Pampas Grass)


 이젠 매사 너무 열심히 생활하려고 아등바등하지 않는다. 그냥 아무 그릇에나 그 모양대로 담기고 막히면 돌아가는  물처럼 살아간다. 매해 연말만 되면 나눠주던 회사다이어리에 빼곡히 적어놓고 실행하던 그 계획이 없어졌다.


 매년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고, 평가받던 그 반복적인 생활이 너무 싫었다. 그 반동 때문인지 앞으로는 그냥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살아보려고 한다. 바깥 풍경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내게 상처를 준다면 우리는 창문을 닫을 수밖에 없으니까.


태안 해변, 소원길


 매사 늘 치열했던 최선의 최선이 아닌, 편안한 차선을 선택하는 무사안일의 삶, ‘아님 말고’를 모토로 내 자신의 삶에만 집중한다. 오늘이 아니면 내일 하면 되고,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한다. 또 이게 아니면 저걸 하면 된다.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나태한 삶이 나의 희망이었고, 그 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사는 지금의 삶이 내 인생 최고의 사치일 뿐이다.



 얼마 전, 일기예보와 달리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선배들과 운동을 마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중 잘 나갔던 몇몇 선배들의 갑작스러운 이른 부고를 듣고, 문득 내가 팔로잉하는 어느 트위터리안이 그의 친구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 탄탄한 어머니의 사업을 승계하여 경제적으로 성공한 친구가 어머니의 말씀을 들려줬다.

사경을 헤매시던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귀를 가까이 대라고 하시더니

"인생 별거 없다. 사업체 정리하고 자유롭게 살아라"라고 당부를 하셨단다. “



집에 돌아와 지난가을에 새로 구입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이태리 칸소네, 카루소(CARUSO)를 들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을 안부를 전하고 싶었다. 나태주 시인의 시, ‘멀리서 빈다’의 한 구절처럼,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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