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테토녀와 에겐남

by 봄날


강원도 원주 오크밸리 앞에 있는 ’ 뮤지엄 산‘(S.A.N)에서 상설 전시하고 있는 영국작가 안토니 곰리전을 보기 위해 아내와 함께 당일 여행을 떠났다. 이미 몇 번 가본 곳이었지만 그 뮤지엄의 이름처럼 스페이스, 아트, 자연과 함께 멀리 아름다운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카페테라스가 있다. 세계 3대 커피라는 하와이 코나 커피와 함께 잠봉뵈르 샌드위치가 먹고 싶었고 아내와 달리 내겐 안토니 곰리전은 덤일 뿐이었다.



그 뮤지엄 산을 둘러보고 돌아온 다음날, 일주일 만에 집에 돌아온 아이를 위해 맛있는 해물탕을 끓이기로 했다. 수행비서로서 당연히 운전을 하고 몇 군데 시장을 보고 많은 물건과 식재료를 사가지고 귀가했다. 그리고 아내는 바로 해물탕을 끓이고 싱싱한 무로 깍두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시장을 볼 때 어른 장딴지만 한 싱싱한 가을무를 보고 너무 맛있겠다고 무심하게 한 말이 화근이 될 줄은 몰랐다.



그 말을 흘려듣지 않은 아내는 무슨 이유에선지 갑자기 깍두기김치를 담근다며 그 큰 무를 두 개씩이나 주워 담았다. 평소 김치를 담그지 않고 맛있는 김치를 사 먹어왔던지라 괜한 수고를 하는 아내를 위해서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할 수 없었다. 특별히 명절날 잡채를 할 때면 가끔 속배추를 가지고 겉절이는 담그고 했지만, 김치를 제대로 담근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의아하게 생각했다.



원주 당일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시장을 보고 돌아와 혼자 부엌에서 해물탕과 깍두기김치를 두 시간이나 만든 탓에 아내를 테토녀(테스토스테론)로 돌변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난 거실소파에서 KLPGA 파이널 경기에서 장장 한 시간에 걸친 두 선수의 5차 연장 승부를 보고 있었기에 아내 혼자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고군분투를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리고 힘에 부친 아내의 도움 요청을 듣고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그때는 늦었다.


용소폭포, 설악산 오색지구


아내는 기운이 달려 확독을 놓친 후 분노가 폭발했고 뒤늦은 수습에 나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힘들면 미리 도와달라 말하지 그랬냐며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지만 아내는 기본적으로 배려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앞으로 벌어질 사태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에겐남(에스트로겐)으로서 성실히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미필적 고의임이 인정되어 재발방지교육은 피했지만, 아내의 침묵에 따라 며칠간 독거노인(DKNY)처럼 생활해야 했다.



아내들은 늘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는데 남편들은 말을 해야 해주는 게 싫다는 것이다. 이렇게 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인게 문제다. 말하지 않은 말보다 더 무거운 것은 없다. 나이 들고 난 후 나는 아내가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맹세했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에게 잔소리를 듣는 것은 번개가 무섭지 천둥은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면 내 수준이 딱 거기까지라는 것이니까.



아내가 결혼할 때 장모님께서 ‘시집가면 엉덩이가 가벼워야 사랑받는다’라고 말씀하셨다는 얘기를 들었건만, 감(센스)이 떨어졌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니까. 사랑도 일하는 것처럼 결국 움직이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알콩달콩 아주 평범하게 생활하는 것,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 하루를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걸 나이가 들면서 새삼 깨닫게 되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