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변명
당대(20,30,40)의 도시남자들과 달리 라떼(?)남자들은 대부분 집안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잘 못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도시 생활 남성들은 회사 일이나 바깥일에서는 창조적인 긴장과 집중을 통해서 좋은 성취를 이루려고 최선을 다한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나 치타가 나무 밑에서 꾸벅꾸벅 졸다가도 먹이를 구할 때가 되면 토끼 한 마리도 최선을 다해 사냥을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회사일과 생업을 위한 일에 있어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게 집중하고 치밀하게 계획하고 최선을 다해 정성을 기울인다. 동물의 왕국의 사자나 치타가 최선을 다할 때처럼.
도시의 아내들도 마찬가지로 집안일, 가사 노동에 대해서는 먹이를 구하는 밀림의 사자나 치타처럼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정성을 기울인다. 때때로 집안의 전구도 갈아 끼우고, 선풍기와 가습기도 분해 조립하고, 주방이나 욕실의 막힘도 뻥뻥 잘도 뚫고 웬만한 가전제품이나 도어락도 분해 조립 및 A/S 등을 바로바로 즉시 해결할 수 있는 기술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주부 십 년 차쯤 되면 집안일에 있어서는 회사로 따지면 거의 임원급 이상의 내공과 관록을 자랑하는 척척박사가 된다.
가끔 이사를 할 때 새로 입주한 아파트에 이삿짐 정리를 웬만큼 하고 나면 그때부터가 도시생활 남자들은 대개의 경우 집안일을 하나둘씩 해나가면서 내가 얼마나 가사노동에 무능한지를 여과 없이 보여주면서 자존감이 무너질 때가 많다. 케이블 TV 연결부터 시작해 도어락 비밀번호 바꾸기, 그림액자 못 박고 수평 맞추기, 커튼 부착, 주방 및 욕실 막힌 곳 뚫기 등을 할 때면 아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더 사고를 치거나 일을 크게 만들 때가 종종 있다.
몇 년 전 이사를 했는데 그림 걸기의 수평을 맞추느라 시멘트 벽에 못을 몇 번 빼고, 박고를 하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듣고는 결국 아파트 상가에서 맥가이버로 불리는 아저씨에게 출장 도움을 요청해 집안의 모든 전구, 설치, 주방 및 욕실의 상하수도 점검까지 서비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전업주부로 집안 일처리에 있어서 대기업 임원급인 아내의 내공이 십분 발휘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LED 전구알 하나 교체하는 것 가지고도 쩔쩔매는 나를 맥가이버 아저씨 앞에서 놀리기까지 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아저씨, 우리 남편은 회사 일 밖에 잘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집안일 하는 것 보면 회사 일도 정말 잘 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내의 말을 듣고 있던 맥가이버 아저씨가 말했다.
“ 밖에서 회사 일 하는 사람이 집안일까지 잘하길 바라면 무리죠. 회사 일만 잘하면 돼요. 그래야 우리 같은 사람들이 먹고 살죠.”
그 맥가이버 선생님(?)의 말씀 덕분에 바닥까지 떨어진 내 자존감을 조금이나마 살려주었다. 센스 있는 말씀에 어찌나 감동을 받았던지, 아내에게 출장비를 평소보다 더 많이 챙겨주라고 조용히 말하고는 냉장고에 있던 비타민 음료까지 가져다 드렸다. 내가 회사 일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알길 없는 맥가이버 아저씨가 센스있게 내 나이를 가늠하고 아직까지 회사에서 존버 하고 있는 걸 보고 대답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남자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집안일에 큰 관심을 갖거나 잘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주부들이 볼 때는 남편이 집에서 잔망스러운 여러 가지 사고를 치거나 집안의 자잘한 일들을 못한다고 밖에서 까지 그러는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된다. 회사 일이나 생업에서 늘 긴장하고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소소하고 자잘한 집안일까지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또한 사고를 쳐도 대개 몇만 원 내외면 해결할 수 있는 스케일을 계산하고 있기 때문에 집중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집안일에 대해서 매사 그러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집을 사고파는 문제나 재테크 같은 중차대한 집안일에는 남자들도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회사 일하듯이 주도적으로 치밀하게 계획하고 추진한다. 가끔은 너무 따지고 치밀해서 마이더스의 손이 아닌 마이너스의 손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 외의 사적 생활은 대충대충 무엇을 사기도 하고 대충대충 어디를 찾아 가고, 아무거나 대충 사 먹기도 한다. 가끔은 잘못돼서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을지언정 회사 일이나 생업을 하듯이 긴장하고 집중해서 하기가 싫다. 설사 잘못된다 해도 간단히 수습되는 범위 안에 있다는 것쯤은 이미 계산하고 있다. 가끔 너무 미안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회사나 생업에서 생각보다 일찍 번아웃되어 아예 집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핑계 같지만 대개의 도시생활 남성 라떼들은 요즘 당대의 남성들과 달리 집안일에 서투른 경우가 많다.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바깥일은 남자, 집안일은 여자라는 요즘 시대의 흐름과는 전혀 맞지 않는 잘못된 성 역할 인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부터라도 바꿔야 하고 바꿔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만 그런가, 아님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