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이야기
TV 드라마를 볼 때면 회사의 본부장급 이상 임원들은 가끔 업무 지시나 결재만 하고 매일 연애할 생각만 하는 것으로 묘사할 때가 많다. 현실의 제대로 된 기업에서는 업무에 치여 잠시 숨 돌릴 틈도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직책이 올라가면 실무에서 손을 놓고 후배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기안에 첨삭 지도를 하고 서류 결재나 하는 순간 곧 회사를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후배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하고 며칠 후 만들어 온 기획안이나 품의서를 보고 맞춤법 수준의 첨삭 지도나 빨간펜 선생님처럼 하는 직장 상사는 요즘은 찾아보기 어려울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요즘은 웬만한 규모의 기업들도 모두 사내 인터넷 전자결재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안 내용을 읽어 보고 맞춤법이 틀려서 중간 결재자가 기안서나 품의서를 반송하고 지적을 해주는 배려 깊은 상사가 더 많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며칠 전 오랜만에 협력업체 사장님들과 저녁을 먹다가 라떼(?)이야기가 나왔다. 나보다도 예닐곱 살 나이가 많은 분들이었는데 70, 80년대 직장 생활할 때는 아침에 일찍 출근해서 부장님 구두를 닦아 놓았다는 ‘가을의 전설’ 같은 이야기부터, 새해 명절에는 부장님 댁에 세배를 가기도 한 얘기부터 지금 현업에 있는 회사원들이 들으면 마치 오래된 소설 같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들 우리 사회의 리더로서 살아가고 있는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다. 나름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빨리 적응하고 기업을 일구어내신 분들이었다. 지금 들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장생활의 애환들을 웃으며 편안하게 말씀할 수 있는 여유와 유머가 있었다.
오래전 평사원 시절에는 임원급은 별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부장님이 가까이 범접할 수 있는 최고 직급이었다. 그때 가장 부러웠던 게 대개 진급 선물로 받은 길이가 좀 있는 상아도장을 가지고 부장 책상 위에 놓여 있는 결재서류를 넘기며 인주를 묻힌 상아도장을 소리 나게 꽝꽝 찍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고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도 어서 빨리 승진해서 저 자리에 가면 실무에서 손을 떼고 멋있게 결재나 하고 또 후배 사원 불러서 검은 사인펜으로 이면지에 나름 업무지시를 하고 난 후, 비즈니스 한다고 외부에 점심이나 저녁을 먹으러 나가야지 하고 꿈을 꾸었다. 결국 그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IMF를 겪고 난 후 세상이 바뀐 건지 시대가 변한 건지 그 부장님과 똑같은 자리에 앉게 된 나는 평사원 때처럼 검은 사인펜을 들고 이면지에 기획안을 직접 작성하고 있었다. 해외 비즈니스를 맡고 있던 나는 IMF를 극복한다고 1997년 말 전후 6개월 동안 치열하게 만든 기획안과 품의한 서류들이 사무실을 옮길 때 쌓아보니 내 가슴까지 높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전산용지의 이면지만 안쓸 뿐 데스크톱 컴퓨터나 노트북을 붙잡고 목 디스크가 두어 번 재발할 때까지 실무에서 손을 놓지 못하는 세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업무 내용이나 기획안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함께 일하는 후배들에게 그때 얘기를 하며 좋은 세상 만났다고 꼰대 짓을 하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무를 놓지 않고 있었던 것이 회사에서 계속 존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실무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기업에서는 존재 이유가 약해지고, 실무의 디테일을 알지 못하고도 할 수 있는 역할이라면 대체 인원은 사내에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일과 업무에서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 특히 상품을 사고파는 기업, 용역과 서비스를 사고파는 기업에서는 RETAIL=DETAIL이라는 말이 있다. 업무의 방향을 제시하는 임원 역할에 있을지라도 디테일이 약하면 추진하는 프로젝트나 일에서 종종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또한 디렉션을 주는 임원 직급쯤 되면 대개의 경우 후배 직원의 말을 잘 경청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listening과 hearing의 차이다. 한편으로는 그런 직급의 임원들은 회사 내에서 후배 직원들이 얘기할 때는 대충 듣고는,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귀가 얇아서 잘 듣고 와서는 가끔씩 후배들에게 어이없는 소리를 할 때가 있다. 모두 업무의 디테일이 약해서 일어나는 해프닝이 대부분이다. 회사에서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본인이 잘 알고 있다. 실력이 없으면 실력을 키우면 될 일인데, 대개는 그때부터 사내 정치를 하며 물을 흐리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회사 일에 있어서 실무에서 손 놓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후배 사원을 제쳐두고 어떠한 직급이든 그 후배가 해야 할 일을 직접 하라는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실무에서 손을 놓지 않는다는 것은 철저한 권한 이임(empowerment)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비효율적이게 똑같은 일을 두 명이 함께 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되면 그 일을 하는 후배 사원도 불만이 생기고 성장할 수 없다. 또한 시키지 않으면 일을 안 하는 수동적인 사원이 될 수도 있다.
직책, 직급이 올라갈수록 실무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것은 어떤 프로젝트나 일에 뛰어들면 끝까지 물고 늘어지라는 뜻이다. 그 프로젝트나 일에 신념을 가지고, 철저하게 디테일을 파악하고 난 후 업무 지시를 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며 지나칠 정도로 정성을 다하라는 뜻이다. 직책이 올라갈수록 업무 지시나 결재만 하지 말고. 그렇지 않으면 곧 그 회사를 떠나야만 할 날이 다가온다.
(조정래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