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경 부자 담담댄스 vs. 3억 빚 있는 차은우
날씨가 미쳤나 봅니다. 너무 더워효. 문만 나서면 습식 사우나에 들어간 것만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말을 비롯한 전체적인 에너지 레벨을 아껴야 합니다. 문득 예전에 썼던 우스운 글 하나가 떠올랐어요. 이 정도로 더울 땐 실없이 웃기만 해도 참 행복하죠. 보시고 피식 거리기만 하셔도 이 글의 쓸모는 다한 셈입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네 얼굴만 뜯어먹고 살 수 있어
저는 잘생기고 싶었습니다. 방구석 백수로 무릎 나온 츄리닝만 입고 살아도 얼굴만 뜯어먹는 여자들이 모셔가는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친아들보다 차은우를 선택한 유병재의 어머니처럼, 내 배 아파 낳은 아들들을 제치고 선택받아보고도 싶었고요.
저요, 진짜 열심히 살았습니다?! 고 1 때 반대항 축구대회에서는 해트트릭으로 반을 승리를 이끌기도 했고,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모든 이성과 헤어질 때마다 택시 차량번호를 적어두는 스윗함도 가졌더랬죠. 비가 오면 오른쪽 어깨 쪽은 늘 젖은 빨래마냥 말랐던 적이 없었어요.
그래도 안 생겼어요. 철저히 외면받았습니다. 정말 아무도 제게 관심을 주지 않았어요. 지구보다 1/15 수준으로 대기가 희박한 행성에서 온 외계인에게도 이렇게 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말 천운과 이 세상, 저 세상, 온 세상 모든 신의 가호로 결혼을 하게 됐지만, 와이프는 환불을 요청하는 블랙컨슈머처럼 울분과 격정을 토로한답니다.
얼굴 말고 괜찮아 보여서 얼굴만 포기했는데,
다른 것마저 시원찮으면 어떡해!!!!!
우리 와이프가 전생에 죄가 많은가 봅니다. 그저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
그런데요, 만약에 제가 정말 차은우 같은 얼굴을 가졌다면 꼭 해보고 싶은 일들이 몇 개 있었습니다. 한 번 들어주시겠어요?
강남역 10번 출구, 뒷골목에 꽤 큰 규모의 커피빈이 있습니다. 콜드브루 한 잔을 시켜놓고 그냥 거기 앉아서 에어팟 끼고 평소 읽고 싶었던 책을 세 시간 정도 읽어 봅니다.
토익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온 대학생들, 친구와 수다 떨러 온 어머님들, 소개팅을 하고 있는 직장인들 전부 나를 힐끔거리는 느낌적인 느낌? 그리고는 입을 가리고 수군거리기 시작해요. 대략 잘 들리지는 않아도, “쟤 좀 봐” 이런 투.
전날 과음을 하고 집에서 잠만 자고 싶은 토요일 오후, 어김없이 핸드폰이 울려댑니다. 좋은 건수가 생겼다며 마침 한 사람이 비는데 미팅 자리에 나와줄 수 없겠냐는 친구의 전화. 지난주, 지지난주 모두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기에 오늘은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겠네요.
역시 미팅의 메카는 준코죠. 전화로 나오라는 친구는 입담이 정말 좋습니다. 그 친구는 준코에 들어가기 전부터 제게 신신당부합니다.
야, 오늘은 진짜 나 좀 밀어줘야 된다
‘알았다’고 세 번 얘기하고, 그래도 읍소하길래 ‘아, 쫌!!!’ 일갈한 끝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즐거운 술자리가 이어지고. 친구의 부탁이 머릿속에 맴도네요. 괜찮은 상대가 있었지만 친구 녀석이 엄청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라 자중하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타율 5할을 넘기는 친구의 입담파티에 마치 방청객 알바처럼 박장대소 리액션 정도만 보여줍니다.
다해서 세 마디 했나? 피곤하기도 하고, 친구도 잘 돼가는 분위기라 2차를 가자는 일행 속에서 오늘 할아버지 제사인데 깜빡했다는 말도 안 되는 드립을 치며, 간신히 빠져나왔어요.
5분쯤 지났을까. 카톡~♪
어디세요?
어? 주선자 친구놈이 찜한 그녀의 얼굴이 프사에 있습니다. 이거 난감하네요. 이어 한 번의 알림음이 더 울리고......
아까 집안에 목사님만 다섯 분이라면서 무슨 제사예요, 거짓말에 재주가 없으시네요 ㅎㅎ
저도 재미없어 나왔어요. 근처시면 한 잔 더 하실래요?
친구야, 미안하다. 나는 오늘 최선을 다했어.
4일째 야근. 팀과 회사의 명운이 걸려 있는 경쟁 PT를 앞두고, 정말 잘 만들어야 합니다. 원래 팀에서는 발표만 맡기려고 했는데 제가 거절했어요. 그건 너무 무책임한 것 같다고. 내가 만든 장표여야 퀄리티 있고 착 붙는 발표가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정말 얼굴만 믿고 일 건성으로 한다는 얘기를 듣는 건 죽기보다 싫었어요. 온전히 능력만으로 평가받고 싶었거든요.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A 고과를 받은 것은 온전히 나의 얼굴이 아닌, 노오력 때문이었죠. 어쩌면 그래서 올해 가장 중요한 경쟁입찰의 발표를 맡게 된 것일지도.
담담댄스 대리, 이걸 해내 버리네.
아니 이렇게까지 안 해도 편하게 사는 데 지장 없으면서,
나 같은 사람은 어떻게 살라고 참, 정 없네 정 없다!
이 모든 게 제 얘기라면 얼굴값이 아닌 꼴값이 되겠죠?
아예 없는 얘기는 아니랍니다. 1번 에피소드에서 수군대는 1인, 2번 에피소드의 입담 좋은 친구, 3번 에피소드에서 '나 같은 사람' 모두 저였어요. 물론 다 늙은 지금, 딱히 잘 생겨지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결혼도 했는데 피곤하기만 하겠죠.
잠깐만, 너무 더워서 스콜이 내리나? 뺨 위로 흐르는 게 내 눈물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