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 「인생의 역사」((주)난다, 2022)를 읽고
시(詩)는 참 어렵다. 지금까지 내 기준에서의 시는 알레고리와 은유, 상징을 겹겹이 쌓아 시적허용이라는 이름으로 비문들을 나열하는 글. 비문을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의 조용한 페스티벌. 소설을 비롯한 다른 글은 누구나 쓸 수 있다면, 오직 시만은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당신은 심장이 찢어질 듯한,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법한 아픔과 고통을 경험해 본 적 있나요?
당신은 사랑하는 누군가, 무언가를 어떤 식으로든 잃어버린 적이 있나요?
당신은 외로움에 못 이겨 가슴을 치며 신세를 한탄한 적 있나요?
당신은 깊은 슬픔에 빠져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삶을 그 심연에 내맡긴 적 있나요?
모든 질문에 하나 정도 Yes 할 수 있다면 시인이 될 수 있고, 모두 Yes 한다면 위대한 시인이 되는 식으로. 어? 그렇다면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다는 건가.
여기, 시에 대한 또 하나의 생각이 있다. 아마 시를 해석할 깜냥이 없어 손쉬운 오해를 택한 듯 보인다. 이를테면
시인은 어떤 심정으로 시를 쓰었는가
어쩌면 무의식의 세계에서
뮤즈의 목소리를 잔뜩 늘어놓고선,
‘자, 해석은 이제 네 몫이야.’ 라며 발표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뭐 대단한 문학평론가 몇 명이
그럴듯한 의미와 주석을 붙여 놓고
독자들은 ‘그런가 보다’ 하면 되고,
시인은 ‘글쎄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말하면 되지 않을까
비겁하지만 속 편한 변명이다. 그래서 나는 그 대단한 문학평론가의 시화(詩話)라도 읽어야겠다 싶었다. 그 대단한 문학평론가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신형철이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건대, 신형철의 신간을 기다리다 맞이한 책이 공교롭게 '시화'였다고 보는 편이 맞다. 신형철 덕분에 시의 독자로서, ‘그런가 보다’ 조차 감사한 일이 되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에 대한 애정과 존경은 이미 수차례 드러낸 바 있다.
이 리뷰는 두 번의 정독 후에 쓰는 것이고, 이미 발행한 전적이 있는 글을 좀 더 성의 있게 보완하여 발행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정확함을 지향하는 신형철의 글을 곧바로 해석할 깜냥이 안돼 형광펜을 들고 잔뜩 줄 쳐가며 읽어야 그나마 조금이라도 내 것이 된다.
프롤로그에 한 편의 시를 실었고, 본문에 해당하는 5부의 각각마다 다섯 편의 시를 실었다. 총 26편의 시를 읽고 나면 시와 같은, 시가 아닌 작품들 혹은 시인들의 삶에 대한 다섯 편의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마지막으로 '박준'이라는 시인에 대한 글로 마무리된다.
책 제목이 「인생의 역사」이기에 각 부의 제목에는 인생의 중요한 챕터들이 표제어로 등장한다. 고통, 사랑, 죽음, 역사, 인생. 이 중 그 자체만으로 부정적으로 해석되는 단어는 고통과 죽음이며, 나머지 사랑, 역사, 인생에 대한 내용 역시 가볍고 유쾌한 마음만으로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전작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느낄 수 있듯, 결국 모든 표제어마다 깔려 있는 정서는 '슬픔'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슬픔은 내가 느낀 슬픔뿐이다. (P. 48)
이 책 역시 시에 담겨 있는 '슬픔'을 공부하는 연장선에 있다. 저자는 슬픔을 극복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느껴보지 못한 슬픔은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단정. 이것은 확고한 진리다. 슬픔은 견뎌내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시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슬픔을 견디고, 체념하여, 내려놓거나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 사람만이 시인의 자격을 얻게 되나 보다.
위대한 패배의 기록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중략)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김시습 <나는 누구인가_자화상에 부쳐>에 대한 평론에서)
우리는 우리의 간절한 필요에 의해 신도, 사랑도 결국 발명해 내고야 만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신을 발명하고, 너를 잃어버리지 않으려 사랑을 발명하는 인간. 그 인생을 자책하듯 적어 내려 간 시를 어떻게 함부로 읽을 수 있을까. 감히 쓸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불행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견디느니 차라리 어떻게든 의미를 찾으려 헤매는 길을 택하기도 한다. (중략) 신은 그때 비로소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강력히 입증하는 증거 앞에서 오히려 신이 발명되고야 마는 역설.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은 인간이 오히려 신 앞에 무릎을 꿇기를 선택하는 아이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욥의 마지막 말>에 대한 평론에서)
나에게 그 무엇보다 종교적인 사건은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곁에 있겠다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이다. (중략) 이 세상의 한 인간은 다른 한 인간을 향한 사랑을 발명해 낼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신이 아니라 이 생각을 믿는다.
(이영광 <사랑의 발명>에 대한 평론에서)
이렇게나 인생 앞에, 시 앞에 겸허한 대가(신형철)에게 가장 감동한 순간이 있다면, 결국 시보다 중요한 것이 인간이고 인생이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다.
나는 21세기의 최승자에 대해서도 그가 출간한 세 권의 시집보다는 그의 육체적·정신적 안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을 받고 있느냐 하는 것 말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건 신이건, 그가 '존재론적 정착'에 성공했기를 바란다. 시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사랑을 얻었으면 그만이다. 최승자는 언제나 살기 위해 썼지 쓰기 위해 살지 않았으니까.
(부록 <실패한 사랑의 역사를 헤치고_최승자의 90년대를 생각하며>에서)
생의 안락함을 부정하며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아니 쓰지 않으면 죽을지도 몰랐던 시인의 삶에 대한 연대. 따뜻하다 못해 절박한 위로를 보내는 데 온 마음과 언어를 바친 저자의 지성에 부끄러움과 감사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쩌면 저자도 이들을 위로하지 않고는 결코 살아낼 수 없었던 걸까.
저자는 시인의 감정과 언어를 짐작만 할 뿐,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 기꺼이 체념한다. 아마도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라 겪는 것이리라는 명제만 알 뿐이다.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평론 중)
결국 여기서 저자는, 그리고 나는 윤동주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씌어진 시가 부끄러웠다는 윤동주만큼 치열하게 고뇌하며 살지 않았던 대다수 사람들이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실정이다. 나 역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제사 겨우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이 부끄러움만으로 누군가의, 시대의, 역사의 불행에서 면죄부를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지 않았으면 한다. 시가 내게 여전히 어려운 것은 신형철 같은 섬세하고 다정한 평론가가 잘 없기도 하지만, 아직 슬픔을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몰상식에서 비롯한 몰염치 때문이리라.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이제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어준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에 대한 평론 마지막 부분에서)
며칠 전의 시부림(먹부림 수준이라 이렇게 써본다)은 이 책을 읽고 출근길에 어떤 뮤즈가 찾아와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써본 시다. 역시, 열등감과 자괴감을 동력 삼아 쓴 시로 인해 다시금 열등감과 자괴감에 빠졌지만, 다행히 나의 자존감에 별 영향은 없다.
그저 하나 배운 셈 치기로 한다. 인생을 시에 담는 일은 역시나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아직 나는 살기 위해 쓰지 못하고, 쓰기 위해 살고 있으니 그 자격이 없다는 걸.
P.S. 윤상하면 나를 넘어서는 덕후가 있을까 괜한 부심을 부렸던 때가 있다. 이젠 그 자리마저 신형철에게 넘겨야 할 것 같다. 2025년의 끝자락에서 나는 저자의 추천대로 <언제나 그랬듯이> - <마지막 거짓말> - <악몽>을 반복 재생하고 있다.
나 역시 천재 뮤지션 윤상의 덕후임을 밝힘과 동시에, 윤상을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신형철의 한 구절을 브런치에 기거하는 많은 덕후들에게 바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 덕질은 우리에게 그런 덕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다. 자꾸만 나를 혐오하게 만드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를 최선을 다해 사랑하는 자신을 사랑하면서 이 세계와 맞서고 있다.
(오타쿠의 덕_어느 '윤상 덕후'의 고백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