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신이라 불리운(시적허용 plz) 사나이는 오직 둘뿐이다. 종범신 이종범과 양신 양준혁. 오랜 타이거즈 팬인 내겐 이종범이 좀 더 판타지스타(Fantasista)였지만, 양신 역시 존경받을 만한 커리어와 야구관을 가졌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이종범이 가지지 못한 유일한 타이틀, 신인왕을 빼앗아간 선수. 공교롭게도 그는 삼성 라이온즈의 레전드이기도 하지만, 기아 타이거즈의 레전드*이기도 하다.
*임창용과의 트레이드로 1999년, 기아에서 단 한 시즌을 뛰었지만 그 한 해 동안 타율 .323, 홈런 32개, OPS(출루율+장타율) .963를 기록했다. 잘 모르는 분들이라면 그냥 리그를 씹어먹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올 시즌 기준으로 당시 양준혁의 성적을 대입해 보면 타율 5위, 홈런 4위(1, 2, 3위 모두 용병), OPS 4위 수준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다.
양준혁의 선수시절 마지막 경기. 자신을 위한 은퇴식과 은퇴경기를 맞이할 수 있는 선수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지만, 양준혁은 그럴 자격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선수였다. 하지만 은퇴경기 상대편 선발 투수는 리그 최고의 에이스 김광현(당시 SK).
김광현은 순위싸움이 치열하던 시즌 막바지, 이 경기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신인 시절 첫 홈런을 양준혁 선배님께 맞았다.
선배님의 은퇴 경기라도 최선을 다해 던지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그것이 은퇴하시는 선배에 대한 예의인 것 같다.
삼진 3개를 잡는 것을 목표로 하겠다
전심전력으로 상대하는 것만한 예우는 없다. 난 이게 왤케 멋있지? 결국 공언한 대로 김광현은 양준혁을 상대로 삼진 3개를 잡았고, 양준혁은 다른 투수(송은범)를 상대로 마지막 타석에 섰다. 소위 홈런 하나 줄 법도 하지만 한 점차의 박빙 속에서 SK 배터리(투수+포수)는 최선을 다했고 결국 양준혁의 마지막 타석은 2루 땅볼로 정리됐다.
내 야구 철학은 쉽게 아웃되지 않는 것
그 마지막 타석에서도, 양준혁은 뻔히 아웃이 예상되는 상황에서도 전력으로 1루까지 내달렸다. 내가 양준혁을 좋아하는 이유가 바로 '전력질주'다. 그는 언제나 땅볼을 치고 1루까지 전력으로 뛰어가는 선수였다. 통산 타율이 3할을 넘고,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쳐도 3할은 우습다는 선수가 가장 최선을 다하는 선수라는 사실에 많은 울림이 있었다.
열심히 해봤자 소용없어, 잘해야지!
신입 시절부터, 일터에서 이 명제를 들을 때마다 동기부여보다는 마음 한 구석에서 왠지 모를 불편, 아니 불쾌함이 솟구쳤다.
타고난 천재들은 분명히 있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잘하기 위해선 무조건 열심히 해야 한다. 다만, 나의 마음은 언제나 열심히 하는데도 잘 안 되는, 마이너리티(Minority) 취급을 받는 메이저리티(Majority)를 향해 있었다. 그 안엔 나도 포함되기 때문이었다.
회사를 오래 다녀보니 나도 똑같은 속물인 건지, 몇 번 발목 잡혀보니(?) 아무런 결과를 내지 못하고 그저 열심히만 하는 사람을 무한 긍정할 수만은 없게 됐다. 나도 이 복잡한 마음을 어떤 언어로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튼 그렇다. 냉정하게도 자신을 위해 다른 길을 빨리 찾는 게 낫겠다는 마음도 든 적이 있다.
그렇지만 나도, 누구도, 심지어는 당사자도 잘 모르겠는 가능성이라는 것을 기대하며, 열심히 하는 후배들에게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 주고 싶다. 가끔 내가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건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니까. 무임승차자(Free Rider)가 되지 않으려 최소한의 본인 몫이라도 최대한 해내려는 이들을 위해서는 시간과 노하우를 기꺼이 내어줄 수 있다.
내가 유이하게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네 번째 시즌을 맞았다. 지난 시즌 소수빈 같은 원석이 또 나오려나 싶은 기대감으로 첫 화를 시청했다.
소수빈만큼의 감동은 아니지만, 귀를 확 사로잡는 참가자가 있었다. 이 참가자는 좋게 말하면 자신감, 나쁘게 말하면 오만해 보이는 태도로 등장했다. 심사위원들의 '제발 잘해달라'는 바람은 참가자의 간절함 때문이 아니라, 태도에 걸맞은 실력을 선보여주길 바라는 일침의 결이었다.
단언컨대 앞으로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이 참가자는 Top 10에는 무난히 오를 것이다. 크러쉬처럼 트렌디한 톤과 리듬감, 랩까지 섭렵할 수 있는 올라운더라는 점에서 지극히 취향이기도 하지만, 취향 다 떠나서 정말 잘한다. 무대 위에서 긴장도 별로 안 하는 것 같다. 원곡자인 비비(BIBI)도 정말 좋아하는 보컬이지만, 이 노래에는 이런 톤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었을 정도다. 2화까지 출연한 모든 참가자 중 내 마음속 단연 1등이다.
그런데 이 참가자는 모든 심사위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다음 라운드로 향하는 데 있어서, 실력으로는 차고 넘쳤지만 음악을 대하는 태도, 소위 진정성 차원에서 한 번의 따끔함을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심사평을 들을 때의 태도를 보면 나는 이 참가자가 거만하다거나 음악에 진정성이 없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오히려 진짜 자신이 있었기에 자신 있다고 말한 것일 뿐인데...... 아무튼 그렇다.
모든 심사위원들의 선택(올 어게인)을 받은 참가자들의 공통점을 꼽자면, 무대를 앞둔 인터뷰에서 음악에 대한 절실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결국 잘하는 사람도 '열심히' 해야 인정받을 수 있는 세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감동의 영역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테크닉은 물론이거니와, 결국 집중하고 몰입하는 태도, 진중하게 접근하려는 마음가짐이 반드시 병행돼야 하는 것이다.
내가 37호 가수라면, 다음 라운드에서는 자신감이 넘치더라도 전략적으로 진지함과 몰입도를 보여줄 것만 같다. 어차피 잘하는 건 다 아니까, 잘하는 사람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분명 이해리는 진실의 턱을 열 것이고, 김이나는 '못 살아~'하면서 어게인 버튼을 누를 것이고, 임재범은
페인트가 드디어 말라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네요. 참 잘했어요
라고 마음을 바꿔먹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 자신감보다는 겸손함이 미덕으로 인정받는 분위기인 것 같다. 자신감이든 겸손함이든 잘해야지 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잘하기 위한 절대적인 노력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잘하게 돼도 우리는 늘 잘할 수 없다. 야구에서, 특히 타자들은 10번의 기회에서 3번만 성공해도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7번의 실패를 용인해 준다는 의미가 7번의 실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까지 팬들이 이해해 준다는 것은 아니다.
4번의 성공을 위해 이를 악물고 달렸던 양준혁이 지금도 추앙받는 이유, '열심히'의 마음가짐은 어쩌면 우리의 실패를 정당화할 수 있는 일종의 보험이라고 하면 너무 속물 같으려나. 부디 '저렇게 잘하는 사람도 최선을 다하는데'라며, '열심히'라는 말이 지금도 죽자사자 달려드는 많은 이들을 가스라이팅하는 의도로 쓰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