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런 선수를 슈퍼스타라고 부릅니다
나중에 이불킥을 하더라도 이 순간을 남겨두고 싶다. 감히 the Baseball이라니... 설레발은 필패이더라도 온몸에 전율이 돋았던 순간을 기억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다.
사이클링 히트(Cycling Hit). 공식 용어로는 히트 포더 사이클(Hit for the Cycle)이지만 대중적으로 사이클링 히트라는 표현이 더 유명하다.
야구 경기서 타자가 한 경기에 단타(1루타)-2루타-3루타-홈런을 모두 치는 경우를 뜻한다. 그렇다면 사이클링 히트를 치는 선수는 야구를 잘하는 선수인가? 내 대답은 '아니다'로 기운다. 실제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한 선수 중, 우리 기억에 남을 만한 스타급 플레이어는 많지 않다.
야구는 평균의 스포츠다. 투수든 타자든 좋은 기록을 남겼다면, 그 숫자들은 결코 몇 경기 반짝 잘했다고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부침은 있겠지만 꾸준히 잘해야 잘하는 선수다. 사이클링 히트 역시, 달성에 필요한 2루타 이상의 장타를 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펀치력이 있어야 하면서도 3루타는 주력도 뒷받침돼야 한다. 기본적으로 야구를 잘하는 선수가 사이클링 히트를 칠 확률이 높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사이클링 히트는 진심으로 운의 영역에 있다. 기본적으로 타자가 한 경기 4타석을 소화하는 편이고, 자기 팀의 점수가 많이 나야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기회가 돌아온다. 야구는 3타석 중 1번의 안타만 쳐도 잘한다고 칭찬받는 종목이다. 사이클링 히트의 기본 전제는 한 경기 4개의 안타다. 운이 좋아 6타석에 들어선다고 해도 4개의 안타를 기록하는 것이 쉽지 않거늘 하물며 그 안타가 각각 단타, 2루타, 3루타, 홈런으로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드물다.
특히 가장 어려운 항목이 3루타다.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은 왜 홈런보다 3루타가 어려운지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위 표를 보면, 전체 홈런 수는 어제 경기를 마친 기준으로 917개인데 비해, 3루타 수는 146개로 한참 못 미친다. 가장 큰 이유는 주력의 차이다. 펀치력이 없는 타자라도 어쩌다 한 번 잘 맞거나 바람의 도움을 받아 홈런을 칠 수 있는 경우가 이따금 발생한다. 하지만 3루타는 펀치력이 좋고 발이 느린 타자는 절대로 만들어 낼 수 없다. 보통 외야수가 바운드된 공을 앞에서 잡으면 단타(1루타)로 막을 수 있고, 바운드되거나 떠서 날아오는 공이 외야수를 지나쳐도 2루에서 막을 수 있다.
따라서 공이 외야수를 지나쳤다고 해도 대부분의 타자들은 3루에 위험하게 도전했다가는 아웃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2루에서 속도를 줄이는 경우가 많다. 특히 햄스트링(허벅지 뒤쪽 근육)은 부상당하면 오랜 기간 재활을 거쳐야 하는 부위다. 무리한 주루플레이를 하다 햄스트링 부상이라도 입게 되면 개인에게도, 팀에도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잘 치는 타자들에게 무리한 주루나 도루를 자제시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루타는 안타의 코스에도 영향을 받는다. 홈플레이트를 기준으로 3루 베이스는 왼쪽에 위치하기 때문에 타구가 오른쪽으로 날아갔을 경우에만 3루에서 세이프될 확률이 높다. 이런 까닭에 사이클링 히트는 홈런을 못 쳐서 안 되는 경우보다 3루타를 못 쳐서 무산되는 경우가 많다.
어제(7/23) 경기에서 나온 사이클링 히트는 KBO(한국프로야구리그) 기준으로 31번째. 43시즌 동안 31번이면 1년에 한 번이 채 나오지 않은 어려운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그 주인공은 21세, 프로 3년 차 김도영 선수다.
사실 요즘 사는 낙이 별로 없다. 굳이 하나 찾으라면 응원팀 기아 타이거즈의 1위 독주와 그 중심에 있는 스타플레이어 김도영의 활약이다.
기아팬이라면 모를 리 없는 2022년 신인 드래프트, 지역 연고제가 살아 있던 당시만 하더라도 기아 타이거즈의 팜(Farm)인 광주 지역에서 두 명의 인재가 동시에 드래프트로 쏟아져 나온다. 한 명은 제2의 선동열로 손꼽히는 문동주, 한 명은 제2의 이종범으로 불렸던 김도영이었다.
지역연고제의 규정 상 1라운드(10개 구단이 신인을 첫 번째로 지명하는 순번)에서는 구단 연고지에서 한 명만 고를 수 있으며, 지명 전까지 타 구단 연고지에 원하는 신인이 있으면 해당 구단 연고지에 상관없이 지명이 가능했다. 쉽게 말하면, 기아 타이거즈가 문동주와 김도영 두 명을 모두 뽑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기아가 김도영이나 문동주 한 명을 선택하면, 나머지 한 명은 무조건 타 구단에서 데려갈 것이라 예상했고, 실제로 그랬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보다 난이도가 높은 선택의 딜레마 상황에서 팬들은 물론, 구단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조계현 전 단장의 판단으로(여기에도 온갖 썰이 난무한다) 기아는 제2의 이종범을 택했고, 제2의 선동열은 제2의 정민철로 바뀌게 됐다.
문동주는 데뷔와 동시에 승승장구한다. 드래프트 이듬해인 2023년 바로 신인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그 해 열린 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로서 병역면제라는 천운까지 얻게 된다. 반면 김도영은 데뷔 첫 해 시범경기 타율 1위에 오르며 개막전 멤버에 포함돼 문동주와 같은 꽃길을 걸을 줄 알았으나, 타율 .237에 머물며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이어진 2년 차에도 시즌 초 큰 부상을 당하며 온전히 시즌을 치르지 못하고 올해 3년 차를 맞았다. 이런 결말은 이윽고 문거김(문동주 거르고 김도영)이라는 조롱 섞인 신조어까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
그리고 올 시즌, 그는 문거김을 비웃기라도 하듯 슈퍼스타로 거듭났다. 우선 KBO 최초로 한 달 안에 10(홈런)-10(도루)를 달성했다. 보통 한 시즌에 20개의 홈런과 20개의 도루를 성공하면, 타격과 주루에서 모두 A급이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를 개막 한 달 만에 달성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20-20마저 시즌 전반기에 달성해 버리고 만다. 그것도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고 손꼽히는 류현진을 상대로 말이다.
어찌 보면 이번 사이클링 히트는 4월 10-10, 전반기 20-20에 비해서 대단한 기록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그저 운이라 치부하기엔 좀 특별한 사이클링 히트다. 바로 내추럴 사이클링 히트라는 것인데, 1루타-2루타-3루타-홈런을 순서대로 날려야만 가능하다. 마치 그는 이걸 노린 것만 같다. 말 그대로 또라이인가.
특히, 3루타가 눈에 띈다. 아까 말했듯 보통의 3루타는 타구를 우중간으로 보내야 도전해 볼 만하다. 하지만 김도영은 2루타를 기록할 때, 우중간에 넉넉한 타구를 보내고도 3루로 뛰지 않아 약간의 질책을 받았다. 그래놓고선 다음 타석에서 좌중간으로 타구를 보내고 그걸 3루타로 만들어 버리니 실로 대단한 주력이 아닐 수 없다.
'발에는 슬럼프가 없다'는 믿음이 있다. 방망이는 잘 맞을 때도 있고, 잘 맞지 않을 때도 있지만 주력만은 언제나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무기다. 그런 점에서 김도영은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위 영상은 말이 안 되는, 그래서 말이 안 나오는 장면이다. 9회초 2아웃, 최형우 타석에 1루 주자는 김도영. 한 점 차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형우가 안타를 쳤다. 이미 2루로 달리고 있던 김도영은 타구를 확인하자마자 궤도를 살짝 틀어 도루에서 주루로 목적을 바꾼다. 직선주로에서 원심력을 살리려 곡선주로로 비튼 것도 놀라운데, 무려 단타에 홈까지 들어오는 폭풍질주를 선보인다. 심지어 송구조차 포기할 정도로 넉넉한 세이프다.
사이클링 히트 달성 후, 인터뷰에서 김도영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번 시즌에는 목표가 없습니다.
그저 무사히 완주하는 것이 목표고요,
이번 시즌이 끝나면 올해의 스탯을 기준 삼아 내년부터 목표를 정할 생각입니다.
마지막 타석에 들어서기 전, 간절한 마음으로 쓰레기를 주웠다는 김도영. 아직까지는 흠잡을 데가 전혀 없다. 이런 그에게 딱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앞으로 크게 다치지 않고 시즌 끝날 때까지 쭉 그의 플레이를 보고 싶다는 것이다. 나는 정말 도영아 니땀시 살어야.
마지막으로 대기록 앞에서 정면승부를 펼쳐준 NC 다이노스 배터리에게도 리스펙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