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담담댄스 Jul 18. 2024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실은 짬뽕이 좋아...

1세대 아이돌 중 가장 좋아하는 그룹은 단연 지오디다. 데뷔 당시의 지오디는 평범한 아이돌 그룹, 어쩌면 슈퍼스타가 되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우연히 본방으로 데뷔무대를 지켜본 내 기억에 남은 유일한 장면은 안경을 쓰지 않은 김태우뿐이었으니.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이 가사 한 줄이었다.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어? 우리 엄마도 그랬는데


아...... 그게 그런 거였구나. 짜장면이 싫다는 속뜻을 알게 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는 나중에 커서 꼭 내 건 곱빼기로 시키고, 자식 몫은 따로 시켜야지.
더 먹고 싶으면 괜히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더 시켜야지






올해로 아빠가 된 지 5년 차를 맞았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아빠가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빠듯한 지경이었다. 일가를 이룬다는 건 곧, 가족 구성원 서로에 대한 책임의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진다는 의미인지라 자신이 없었다. 파트타임으로만 일해도 혼자 먹고사는 데에는 큰 지장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가치관이 달그런 모습이라졌다. 스트레스 안 받고 취미로 다니려 했던 회사가 절실한 밥줄이 됐다. 아이가 태어나자 압박감은 더욱 심해졌다. 성과급 소문에 신경 쓰게 되고, 승진이 못내 아쉬운 사람이 됐다.


그런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나도 썩 이상하게 자란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나처럼 키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컸다.


우리 부부는 아이를 낳기 전부터 다짐을 했다. 절대 주변의 말에 귀닫고, 우리의 페이스(Pace)대로 아이를 키우기로. 하지만 아이를 중심으로 생겨나는 커뮤니티 안에서 누군가


어머, 얘 천재 아니에요? 지금 뭐라도 스펀지처럼 배울 텐데


한 마디에 당장 학습지라도 시켜야 할까 마음이 급해진다. 나중에 능력 없는 부모를 원망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누구는 방문교사로 한글과 영어를 시킨다더라, 영어유치원이 어떻다더라, 요즘은 태블릿으로도 공부가 가능하다더라. 가뜩이나 솔바람에 나부끼는 얇은 귀가 주유소 이벤트 풍선 같다.


문득, <어머님께> 저 대목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내 몫의 짜장면을 따로 시키고자 했던 그 마음과 함께 말이다. 기저에는 "아이의 행복 < 나의 행복"이라는 당위와 의지가 공존했을 것이다. 부족한 시절에는 어쩌면 자식에 대한 희생이 당연했을지 모른다. 누구도 배부를 수 없다면 그나마 아이라도 배부르는 게 더 행복했을 테니까. 난 그게 싫었다. 자식에게 희생하는 부모보다 나도 자식도 모자람 없이 행복한 부모를 꿈꿨다.


<어머님께>의 시절보다 풍족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부모라는 이름으로, 자발적으로 짊어진 희생의 양상은 더욱 드라마틱하다. 아직 취향도 만들어지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좋은 브랜드를 입히고, 한글보다 영어를 말하면 더욱 기뻐한다. 오롯이 비교의 함정에 빠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배고픔을 참고 짜장면을 나눠주는 건 낭만적이기라도 하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희생인 걸까.


희생은 대가를 바라는 법이다. 그 대가는 누가 정량적으로 정해주는 것도 아니다.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의 '어떻게'가 대가의 크기 아닐까. 이 '어떻게'는 부모의 그릇마다 다르다.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많아질수록 서운함의 정도도 비례해 늘어나기 마련이다. 온전한 내 몫이라고 생각했던 짜장면에서 자식에게 덜어준 만큼 집착하는 셈이랄까. 이제는 영어유치원에서 배워온 영어의 능숙함이 부모의 행복을 결정지어버릴지도 모른다.






다시금 유년 시절을 떠올려본다. 그 기억 속엔 부잣집 친구들도 원하는 것을 다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시절이 넉넉지 못했기에, 모자람과 부족함을 아는 것이 미덕이자 아이 스스로 뭔가를 해낼 수 있도록 동기부여하는 방법임을 그때의 부모들은 알았나 보다. 지금은 빠듯한 살림 속에서도 아이가 원하는 걸 웬만하면 사주는 시대다. 어쩌면 그 시절, 모자라게 자랐던 아이들이 부모가 되어 '내 새끼만은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풍요롭게 자란 아이들이 세상의 풍파에 스스로 버텨내는 힘을 어떻게 기를 수 있을지 걱정이다. 분수에 넘치게 키우는 것도 문제지만, 일부러 모자라게 키우는 것도 뒷맛이 개운치 않다. 이럴 때 나는 지오디를 되새기기로 한다. 짜장면을 곱빼기로 시키고, 아이는 보통을 시켜주자. 모자라면 탕수육과 깐풍기도 시켜주자. 한 달에 한 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되뇌고, 되뇌어 본다. (두 번은 조금 힘에 부치네?;;)

작가의 이전글 대한민국 축구에 고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