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타임 노씨다.
열정은 사라지고, 냉정은 길을 잃었다. 진득하고 차분히 무언가를 끌고 갈 힘은 없는데, 불쑥불쑥 찾아오는 화와 감정기복을 다스리기 어려웠다. 그럴 땐 절대 글이 안 써지더라. 지금도 그런 상태가 많이 좋아진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도 기록해 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럴 땐 그냥 이것저것 찾아서 본다. 무료로 도파민을 퐝퐝 터뜨려주는 유튜브 만한 게 잘 없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숏폼에는 큰 매력을 못 느낀다. 다행 쪽에 가까운 것 같다. 노래도 앨범 전체를 듣는 습관을 들였더니 다른 사람들보다 남다른 귀가 열린 것처럼, 유튜브도 풀영상을 봐야 전후 맥락을 파악할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자극적인 부분만 편집된 숏폼을 보고 있자면, 목소리마저 짜깁기된, 무색무취무미한 AI 음성으로 악의적인 해석이 붙은 숏폼을 보고 있자니, 저 폼 안에 들어간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할까 싶다.
와이프가 채널 하나를 추천했다. <정희원의 저속노화>라고 했다. "아, 난 싫어, 가속노화 할 거야" 부르짖었던 가치관과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켰다. 노년의학과 정희원 교수는 신기하게도 입담이 콘텐츠와 결이 같았다. 추구하는 음식만큼이나 담백하고 슴슴한 말투가 노잼인데, 계속 들으니 중독성이 있었다.
정희원, 이 분은 의사에 대한 편견을 깨주기도 했다. 의사들은 모조리 다 T일 거라는 편견. 나는 F가 단순히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만은 보지 않는다. 진정한 F형 인간은 언어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사람. 그런 사람이 진정한 F다. 그런데 이 분은 그게 되더라. 이런 의사는 솔직히 처음 봤다. 내담자와의 진료 이력으로 쌓인 부단한 훈련의 결과일 거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재미없게 사는 훈련 중이다. 원래도 없던 약속을 더욱 줄이고, 하기 싫은 운동도 하기 싫다고 투덜대면서 꾸준히 한다. 딱히 저속노화를 위해서는 아니다. 남은 사람들을 위한 최대한? 최소한? (뭐든 좋다)의 노력이랄까.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졌나.... 그 정도는 아니고 좀 더 오래 누리려면, 좀 더 제대로 누리려면 평소에 노잼라이프를 견딜 수 있어야, 아니 즐길 수 있어야 한다. 재미없는 것이 재미있을 지경. 연습 중이다.
<정희원에 저속노화> 채널에 의외이면서도 반가운 게스트가 나왔다. 코미디언 이경규다. (본인은 예능인, 개그맨, 코미디언 중에 코미디언으로 불리는 걸 제일 좋아한단다) 이 콘텐츠를 뭐라 부를까. 마라맛 평양냉면? 고추장 뺀 제육볶음? 아이러니에서 나오는 재미, 이것이 고오급 유머이자 블랙코미디의 핵심이다. 예능적인 모먼트를 만들고자 버럭 호통을 치는 이경규 옆에서, 정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정희원을 보고 있자니. 오랜만에 도파민 뿜뿜이다.
내가 이경규를 좋아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다. 우선 60이 넘어서도 드립을 너무 잘 친다. 그 감각은 가히 천부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하나는 변화(a.k.a. 트렌드)를 수용하는 움직임이 너무 기민한데, 그 안에서도 철저히 자기중심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소확행이 아니라 대확행을 주장한다든지(자세한 내용은 그가 나온 아무 유튜브만 봐도 알 수 있다). 공중파 → 케이블 → 종편 → OTT → 유튜브까지, 몇십 년에 걸쳐 플랫폼이 변하지만 늘 중심 내지는 중심에서 아주 가까운 주변부에 머무르며 메인 플레이어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은 정말 존경스럽다.
박수칠 때 왜 떠납니까?
이렇게 겸손한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것도 슈퍼스타들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봤을 때 이경규는 슈퍼스타의 자격을 충분히 갖췄다. 이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나를 찾지 않을 때 비로소 사라지는 것이지 떠날 때를 내가 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러고 보니 요즘 유튜브에서 이경규가 자주 보인다. 아! 책이 나왔단다. 책, 그래 내 평생의 숙원이지만 절대 할 수 없겠지. 정말 아무나 낼 수 있는 게 책이고, 누구나 함부로 낼 수 없는 것도 책이다. 좋은 책에는 대가만이 제시할 수 있는 통찰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연예인들이나 정치인들이 자기 브랜딩이나 다른 목적을 갖고 책을 내는 경우를 많이 봤고, 그마저도 대필이 아닐까 의심을 한 적이 많다.
이경규의 책도 그렇겠지, 싶다가도 대가의 책이라면 서투른 글빨이라도(그마저도 출판사의 도움을 받겠지만) 분명 통찰 가득한 문장들이 있을 것이다. 통찰이 엄청나다면 문장력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쭙잖게 어려운 표현 쓰는 것보다는 말하는 듯이 편하게 써주는 게 훨씬 낫다. 큰 맘 먹고 용돈의 일부를 털어 이 책을 샀다. 「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아, 두 번째 훈련 이야기를 해야겠다. 저 콘텐츠를 필두로 이경규가 최근에 나온 유튜브를 시나브로 섭렵하고 있다. 역시 대가는 남다르다. 내가 꽂힌 건 두 가지인데 하나는 '말을 줄이라'는 것과 남은 하나는 '고독을 즐기라'는 거였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당연하지만 무서운 말이다. 저 굴레에 갇히면 문제가 생긴다. 사람을 많이 만나고 다닌다고 그 사람들이 나의 입신양명에 큰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과 얘기하다 보면 숨쉬는 것처럼 실언을 주고받는다. 세상에 공짜 없다고 나가는 돈은 전부 다 어쩔 것인가.
나이 들수록 고독은 직면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자식들은 내가 늙어갈 때 수발의 방식과 빈도를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요양원에 보내면 다행... 곁에 남는 건 배우자뿐이고, 그마저도 없다면 홀로 늙어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외로움도 연습이 필요하다. 나혼자 밥을 먹고, 나혼자 TV 보고, 요리를 하고, 콘텐츠를 보고, 글도 쓰고. 그래야겠다고 생각한 결과가 오늘의 글이다.
이런 연습과 훈련을 하면서 잘 지내고 있다는, 아무도 안물안궁한 소식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