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까

이 구역 경비원

by 로미코샤Romicosha

내가 한 행동 때문에 누군가 다쳤거나 상처받았을 거라고 의심해 본 적 있나요?


저는 그 '혹시'라는 단어에 매번 붙잡힙니다.

작은 불안이 하루를 끝없는 반복 버튼에 가둡니다.




에피소드


저는 루푸스 환자라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혈액검사와 소변검사를 받습니다.

어느 날 검사를 마치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왔는데,

무심코 맨손으로 문고리를 잡아 버렸습니다.


순간, 세균 다큐멘터리 현미경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됐습니다.

방금 씻은 손이 무용지물이 된 느낌.


마침 복도에 세면대가 보여 “저기서 다시 씻으면 되겠다” 싶어 다가갔지만,

비누가 없었습니다.


결국 화장실로 돌아가 물비누를 짜서 손에 묻히고 나왔는데,

그만 바닥에 한두 방울 흘렸습니다.


그 순간, 한 할아버지가 미끄러져 넘어지며 눈이 별 모양이 되는 만화 장면이 스쳤습니다.

여자화장실인데 왜 할머니가 아니라 할아버지가 떠올랐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입니다.


‘여긴 병원이고 어르신들이 많을 텐데... 정말 누가 넘어지면 어떡하지?’

찝찝한 마음에 결국 다시 들어가 휴지로 바닥을 닦았습니다.

그리고 또 손을 씻었지요.


“이제 끝.”

아니었습니다.

나갈 때의 문고리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밖의 세면대에서 한 번 더 씻으면 완벽할 것 같았습니다.

다시 비누를 짰고, 이번에는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으려

고개를 숙이고 조심조심 걸어 나왔습니다.


마침내 바깥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스스로에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 근데 이러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겠네.”


비슷한 일이 온라인에서도 일어납니다.

평소 저는 남을 공격하는 글을 쓰지 않습니다.

성격상 남을 깎아내리는 걸 싫어하고, 강박이 있으니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악플 때문에 누군가가 치료를 받았다거나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보면 불안이 몰려옵니다.


‘혹시 내가 예전에 쓴 댓글 중에 누군가를 상처 입힐 만한 게 있었나?’

기억 속엔 없는데, 확인 없이는 버틸 수가 없습니다.


결국 과거 댓글 기록을 끝까지 스크롤하며 확인합니다.

당연히 악플은 없지만, 마음은 찝찝합니다.


물비누 한 방울, 댓글 한 줄.

강박의 눈에는 둘 다 같은 위험물입니다.




심리 분석


이건 ‘책임 강박(responsibility OCD)’의 전형입니다.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상황인데도

‘혹시라도’라는 생각이 불안을 증폭시킵니다.


물리적 피해: 바닥에 떨어진 비누 → 누군가 미끄러질지도 모른다.

심리적 피해: 과거 댓글 한 줄 → 누군가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

다른 영역이지만 같은 메커니즘이 반복됩니다.


핵심은 확률 왜곡과 통제의 착각입니다.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을 마치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느끼고,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결과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죠.




완화 팁


강박 영화라고 부르기

떠오른 재난 시뮬레이션을 “내 머릿속 상영작”이라고 이름 붙이세요.

그 영화는 대개 예고편에서 끝납니다.


확률적 사고 연습하기

‘혹시라도’ 대신 ‘확률적으로 거의 없다’로 사고를 전환하세요.


재확인 줄이기

댓글 기록 뒤지기 같은 확인 행동은 불안을 강화합니다.

횟수를 줄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책임 범위 정하기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하세요.

‘조심하는 것’과 ‘모든 결과를 책임지는 것’은 다릅니다.


충분히 안전하기

사고 가능성을 0%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대신 ‘충분히 안전하다’ 수준에서 멈추는 게 목표입니다.



*제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심하면 꼭 전문가와 상담하세요.*



성공담 공유


어느 날 카페 화장실에서 비누가 조금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냥 두고 나왔습니다.

예전 같으면 닦고 또 씻었을 테지만... 아무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하루는 예전에 쓴 댓글을 확인하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지만,

일부러 안 눌러봤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무 일도 없었고, 세상은 평소처럼 흘러갔습니다.



마무리


강박은 늘 ‘혹시’라는 단어를 이용합니다.

비누 몇 방울, 댓글 한 줄...

그 작은 것들이 세상의 재난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은 대부분 아무 일 없이 지나갑니다.


강박은 언제나 재난 예고편을 틀지만,

정작 본편은 상영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전 07화외출 시 알코올 스프레이는 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