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광펜 색 맞추기의 함정

강박 치료 책 읽으며 강박적 행동하기

by 로미코샤Romicosha

강박증을 고치려고 책을 읽다가, 강박 행동을 해본 적 있나요?


저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제 인생이 블랙코미디였습니다.




에피소드


저는 이북 앱으로 책 읽는 걸 좋아합니다.

특히 ‘형광펜 칠하기’ 기능은 제 마음에 쏙 듭니다.

나중에 급할 때 형광펜을 칠한 부분만 읽으면 되겠다는 묘한 안심감이 들거든요.


그날도 저는 하늘색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예전에 칠했던 페이지를 열어봤습니다. 노란색이었습니다.


“어?”


과거 기록을 더 살펴보니 하늘색, 노란색, 보라색... 제각각이었습니다.

그 순간 제 머릿속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습니다.


‘이건 너무 제멋대로야. 신경 쓰여... 통일해야 해.’


저는 결국 읽고 있던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훑었습니다.

모든 형광펜을 하늘색으로 바꿨습니다.

색깔이 균일하게 맞춰졌을 때, 묘한 성취감이 밀려왔습니다.


“이제야 속이 시원하다.”


그런데 몇 초 뒤, 저는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 책은 강박장애 인지치료 책이었거든요.

강박증을 고치려고 읽은 책에서, 강박 행동을 정교하게 완성해 버린 겁니다.


“이게 무슨 자가진단 테스트도 아니고...”


저는 책을 덮고 스스로의 아이러니에 한참을 웃었습니다.




심리분석


이건 ‘정리·대칭 강박’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물건이나 색깔, 배치가 일정해야 한다는 강한 필요가 있고,

어긋난 상태를 견디기 어렵습니다.


아이러니한 건, 자기 증상을 다루는 책에서 그 증상이 정교하게 발현됐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자기 인식이 바로 웃픈 순간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강박 환자뿐 아니라 일반인도 흔히 겪습니다.

예: 파일 폴더 색을 꼭 맞추거나, 다이어리 스티커를 좌우 대칭으로 붙이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한 경우.


하지만 강박에서는 그 불편이 훨씬 강렬하고,

행동으로 옮겨야만 진정됩니다.

이런 메타인지적 순간 -강박에 대해 배우면서 강박 행동하기- 는

강박의 자동성을 잘 보여줍니다.

의식적으로 알고 있어도 자동으로 발동되는 것이 강박의 특징입니다.




완화 팁


불일치 남기기 연습하기

일부러 형광펜 색을 다르게 남겨두세요.

예: 첫 챕터만 노란색, 나머지는 하늘색.

처음엔 불편하지만, 반복하면 ‘이래도 괜찮다’는 경험이 쌓입니다.


무작위 선택하기

매번 색을 랜덤으로 골라 칠하기.

뇌가 ‘다양성 = 정상’이라는 새로운 학습을 하게 됩니다.


불편을 관찰하기

강박이 발동한 순간을 기록해 두고,

나중에 다시 읽으며 웃음거리로 재해석하기.

“강박 책 보면서 강박했다” 같은 상황은 훌륭한 유머 소재가 됩니다.


완벽 대신 충분히

‘읽고 이해했다’는 본래 목적이 충족됐다면,

형광펜 색은 덤일 뿐이라는 걸 떠올리기.


메타인지 활용하기

“아, 지금 또 강박 행동을 하고 있네.”

이렇게 자각하는 순간이 변화의 첫걸음입니다.



*잠깐! 제 방법이 모든 사람에게 맞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더 안 좋을 수도 있어요. 심하면 꼭 전문가와 상담하세요.*



성공담 공유


읽고 있던 다른 책의 형광펜 기능을 보니 역시나 색이 통일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 같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칠했을 텐데, 그냥 내버려 뒀습니다.


또 한 번은 의도적으로 형광펜을 다르게 칠해봤습니다.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었지만, 그 책만큼은 그냥 뒀습니다.

나중에 다시 봤을 때도 여전히 보기 싫었지만...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마무리


강박은 종종, 고쳐야 할 대상이 아니라 코미디 대본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강박 책을 읽으며 강박 행동을 하고,

그 순간을 다시 글로 써 웃음을 만듭니다.

증상은 여전하지만,

웃을 수 있다면 반쯤은 회복된 것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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