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말리는 밤
어제 빨래를 널었다.
바람도 적당했고, 햇빛도 충분했다.
날씨 앱은 “빨래하기 좋은 날”이라고 알림까지 보냈다.
그런데 저녁에 이불을 만져보니 축축했다.
이상했다.
손으로 다시 만져봤다. 여전히 눅눅했다.
세탁기 오류? 탈수 부족? 아니면 내가 젖은 손으로 만진 걸까?
가설은 여러 개였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이건 밖에서 말릴 문제가 아니다.
그날 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원래 이불 속은 안전지대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완벽한 피난처.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거기,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모서리 쪽에 작고 둥근 무언가가 붙어 있었다.
처음엔 베개 커버에 붙은 보풀인 줄 알았다.
그런데 눈을 깜빡였다.
보풀은 눈을 깜빡이지 않는다.
며칠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 말도 없고, 표정도 없고, 가끔 눈만 깜빡였다.
나는 그걸 츠키마루라고 불렀다.
이름을 물어본 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보였고, 부르다 보니 익숙해졌다.
처음엔 무서웠다.
이불 속에 정체 모를 존재가 산다니.
하지만 생각해보면, 나도 이불 속에서 정체 모를 감정들과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쯤 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느 날 새벽, 냉장고 문을 열고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 츠키마루가 조용히 다가와서 문을 닫았다.
그게 다였다.
위로도 없고, 설명도 없고, 그냥 닫기만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 뒤로 가끔 츠키마루를 기다렸다.
뭔가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뭔가를 멈춰주는 존재.
그게 필요할 때가 있다.
또 어느 날은, 이불 끝에서 작은 냄새가 났다.
포도 같기도 하고, 차 같기도 한.
눈을 떠보니 탁자 위에 찻잔이 놓여 있었다.
언제 생긴 건지, 누가 놓은 건지 모르겠지만 마셨다.
따뜻했다.
아니, 정확히는 적정 온도였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미지근하지도 않은.
누군가 내 상태를 측정한 것처럼.
나는 그 차를 내린 존재를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분명 누군가 있다.
말은 없지만 타이밍이 정확한 존재.
나는 그걸 부도마루라고 불렀다.
역시 이름을 물어본 건 아니다.
이불 속에는 생각보다 많은 게 살고 있다.
말을 안 하니까 몰랐던 것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나도 말을 안 하니까 서로 몰랐던 것뿐이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혼자 있어도 괜찮아.”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혼자 있는데 외롭다면?
혼자 있는데 이불이 눅눅하다면?
그럴 땐 이불 속 존재들이 가끔 나타난다.
문을 닫아주거나
차를 내려주거나
그냥 옆에 앉아 있거나
그렇게 이불은 조금씩 마르는 중이다.
완전히 마를진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 정도면 괜찮다.
아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그것도 아닐 수 있다.
그래도 말리는 게 낫잖아.
이불 속에서 살아가는 건,
감정을 말리는 일과 비슷하다.
조금씩, 조용히, 반복적으로.
그리고 거기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감정은 혼자 말릴 수 없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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