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말리는 밤
이불속은 안전하다고 믿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무엇보다 나를 재촉하지 않는다.
완벽한 피난처.
하지만 오늘 아침, 나는 그 안에서 일어났고... 이불이 젖어 있었다.
물리적인 젖음은 아니다.
그랬다면 건조기로 직행했겠지.
세탁 모드 ‘이불’, 온도 ‘고온’, 시간 ‘90분’.
문제 해결.
하지만 이건 그런 종류의 습기가 아니었다.
촉촉한 무언가가 밤새 스며들어 있었다.
불안, 후회, 자책, 민망함, 피로.
그리고 이름 붙이기 귀찮은 감정들.
심리학 서적에서는 이런 걸 ‘미해결 감정’이라고 부르던데,
나는 그냥 ‘이불 젖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감정의 이름을 붙이면 사라진다”는 말은 틀렸다.
나는 이미 이름을 붙였지만, 아직 눅눅하다.
설거지를 끝내고 거실로 돌아왔다.
창문엔 햇살이 들어오고, 공기는 맑았고,
날씨 앱은 ‘빨래하기 좋은 날’이라고 했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괜찮아.”
그건 독백이었고, 주문이었고, 아무도 듣지 않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말을 하면 조금 실감이 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면 하루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좋은 말이다. 정말.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괜찮지 않아도 설거지는 해야 하잖아.
괜찮지 않아도 빨래는 돌려야 하잖아.
괜찮지 않아도 일은 해야 하잖아.
괜찮지 않아도 밥은 넘어가잖아.
그게 슬픔이자 초능력이다.
감정 상태와 무관하게 루틴은 굴러간다.
냉장고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양파는 스스로 썰리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오늘은 이불을 말리기로.
감정의 상태는 몰라도, 습기는 제거하는 게 위생상 옳다.
곰팡이 피면 버리기 아까우니까.
이불을 끌고 베란다로 나갔다.
햇빛이 들어오고, 바람이 불고,
이불은 조금씩 흔들렸다.
보기엔 평범한 이불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그 위에 앉은 츠키마루는 무표정이었다.
표정이 없다는 건 좋다.
위로도 안 하고, 걱정도 안 하고, “왜 그래요?”라고 묻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 있다.
이불 끝에 붙어서, 가만히 햇빛을 받고 있다.
그 무표정 속에는 확실히 이렇게 쓰여 있었다.
“그래도, 말리는 게 낫잖아요?”
맞다.
말려도 완전히 마르진 않을 수 있다.
내일 또 젖을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말리는 게 맞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니까.
감정은 루틴을 멈추지 않는다. 루틴은 감정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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