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문 앞에서 감정 정지

감정을 말리는 밤

by 로미코샤Romicosha

새벽 3시 42분, 나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뭘 찾으려던 건지는 기억이 없다.

물? 우유? 아니면 그냥 차가운 빛?


어쨌든 문은 열렸고, 나는 그 앞에 서 있었다.


안에는 반쯤 마른 양배추, 반쯤 상한 토마토,

유통기한 3일 지난 두부가 있었다.

그리고 조금 식어버린 마음 하나.

마음은 2단 왼쪽에 있었다.


정확히는, 아마 내 안에 있었겠지만

냉장고에 두는 게 더 시원할 것 같았다.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진 건

냉장고 때문인지 내 탓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잠시 서 있었다.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른다.

1분? 5분? 아니면 오늘 하루의 3%쯤?


냉장고 앞에서는 시간이 정지한다.

아니, 정확히는 감정이 정지한다.


생각도 멈추고, 의지도 멈추고,

그저 냉기만 들어온다.


사람들은 이런 순간을 '멍 때림'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게 좀 더 깊은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냉장고 문을 열면 차가운 빛이 나를 비춘다.

나는 아무것도 꺼내지 않는다.

전기세가 나간다.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건 선택이 아니다.

그냥 멈춘 거다.


뭔가를 찾으려고 문을 여는 사람이 있고,

뭔가를 피하려고 문을 여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였던 것 같다.


정확히 무엇을 피하는지는 몰라도,

냉장고 문을 열면 잠시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기분이 든다.

차갑고, 밝고, 아무 생각 없는 세계.


문제는 그게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냉장고는 계속 윙윙거리고,

냉기는 점점 차가워지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꺼내지 않는다.


그러다 이상한 생각이 든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이 질문이 떠오르면 끝이다.

정지가 풀리고, 현실이 돌아온다.


하지만 냉장고 문은 여전히 열려 있고,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그 타이밍이 가장 곤란하다.








그때 츠키마루가 문을 닫았다.


소리가 작게 났다. 딱.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냉장고 손잡이를 밀고, 그냥 가만히 나를 봤다.


표정은 없었지만, 그 무표정 속에는 확실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제 닫아도 돼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츠키마루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그냥 닫았을 뿐이고, 나는 그걸 받아들였을 뿐이다.


어떤 순간엔 해결이 아니라 중단이 필요하다.


냉장고 문을 닫는 것처럼.

생각을 멈추는 것처럼.

감정을 일시정지하는 것처럼.


츠키마루는 그걸 안다.








나는 냉장고 문에 붙어 있던 자석을 봤다.

'괜찮음 ON'이라고 쓰여 있던 자석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언제 떨어진 건지 모르겠다.

냉장고 문을 열 때였을까, 닫을 때였을까.

아니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떨어져 있었는데

내가 못 본 걸까.


주웠다.

손에 쥐고 한참 봤다.


다시 붙이지는 않았다.


괜찮음을 ON으로 설정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스위치를 누른다고 켜지는 것도 아니고,

자석을 붙인다고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늘은 OFF 상태로 두기로 했다.

그 정도면 오늘 하루는 충분했다.








이건 실존이 아니라 대기 모드다. 그리고 가끔은, 대기 모드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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