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남아있는 나날> 리뷰
감독: 제임스 아이버리
출연: 안소니 홉킨스, 엠마 톰슨, 휴 그랜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달링턴 저택의 집사인 스티븐스는 새로운 주인 루이스의 배려로 영국 시골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표면적인 목적은 과거 달링턴에서 총무로 일했던 캔튼을 다시 불러오기 위한 것이지만, 그는 과거 자신이 했던 실수를 바로잡고자 한다.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떠나보내고 말았던 그녀와 다시 함께하고자 하는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달링턴의 사후, 저택이 미국 하원의원 출신인 루이스에게 팔린 시점이지만, 영화의 많은 부분은 스티븐스의 기억에 따른 달링턴 저택의 한창 시기를 담고 있다. 그가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은 팬튼을 만나러 가는 여정과 함께 하는데, 여행이라는 새롭고 낯선 경험과 함께 그의 기억 속에서 친숙하고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교차된다는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그가 여행을 하는 현재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디졸브로 편집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관객들은 과거의 기억을 마치 현재의 사건처럼 느끼게 된다. 의도적으로 과거를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부엌 문의 작은 창을 통해서 응접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보는 현재의 장면이 팬튼이 걸어오는 과거의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그에게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으며 어쩌면 현재보다 더 또렷한 과거의 잔영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처럼 스티븐스에게 과거는 지나가버린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것이며 그는 아직도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그가 추억하는 달링턴 저택의 번성기는 역설적으로 모든 사람이 불행한 결말로 가는 시기였다. 스티븐스가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최선을 다해 치러냈던 만찬의 실상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참혹한 홀로코스트라는 만행을 일으킨 독일의 번영을 위한 자리였으며, 그 시기 그에게 실망한 팬튼이 불행한 결혼으로 도피하게 된다.
영화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두 사람, 달링턴 경과 스티븐스는 각자 자신의 철학에 따라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다.
“만족이란 최선을 다해 주인님을 모시는 것” 이라며 “주인이 부나 계급이 아닌 도덕적으로 훌륭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말하는 스티븐스. 그러나 달링턴은 결과적으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협조하였기에 영국 국민들에게 ‘나치스’ 라며 욕을 먹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에 가해진 경제적 조치가 과하다는 생각에 독일의 부활을 위한 선한 의도였으나, 결국 나치에 철저히 이용당하고 쓸쓸한 죽음을 맞이 한다.
집사로서 최선을 다해 주인을 모시는 스티븐스는 스스로가 만들어 둔 한계 속에서 자신의 일 이외의 모든 것에는 귀를 닫고 있었다. 매일 아침 신문의 모든 페이지를 다림질 하지만 신문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현실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랑에 대한 고전을 읽지만 팬튼이 온몸으로 보내오는 사랑의 신호와 그녀가 불러일으킨 자신의 감정은 무시한다. 그 결과 팬튼은 떠났으며, 자신이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달링턴의 집사’라는 과거를 숨기고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영화 속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영국 신사, 점잖고 선량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선량함이 잘못된 방향을 향할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보여준다.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이유로 유대인 하녀를 집에서 내보내기로 결정한 달링턴과, 주인의 결정이 부당함을 알고 있으나 집사는 주인의 뜻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 결정을 그대로 수행하는 스티븐스.
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소신을 따랐으나 그 결과는 참혹하다. 선한 의도에서 나온 그들의 악행은 더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나 아렌트는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을 이야기한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보며 알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변명 거리를 찾게 된다면, 어쩌면 그들에게서 내 안에 있는 그들과의 유사점을 발견한 것인지도 모른다.
스티븐스는 과거에 자신이 했던 실수와 놓쳐버린 기회를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그의 인식이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재회한 팬튼과 나눈 대화에서 그녀가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자, ‘달링턴으로 돌아가서 하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대답하는 그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집사의 역할을 수행하다 쓸쓸히 죽음을 맞이 한 그의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 겹쳐지기 때문이다.
영화의 엔딩 씬에서 잘못 날아든 비둘기를 다시 하늘로 날려 보내고 창문을 닫는 그의 모습과 달링턴 저택의 전경이 오버랩되면서 그는 그 저택과 함께 과거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남아있는 나날’은 어느덧 노인이 된 스티븐스의 남은 여생에 대한 이야기 임과 동시에 그가 여전히 사로잡혀 있는 잊지 못할 나날들을 의미한다. 평생을 달링턴 저택을 위해 헌신한 그의 인생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