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쟈 May 08. 2020

나에게로 다가온 속죄의 시.

영화 <시> 리뷰

출연: 윤정희김자영이다윗김희라

감독: 이창동



영화의 시작 장면에서 강물은 흘러가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새로운 사건과 인연이강물을 따라서 나에게 다가온다. 

희진이가 몸을 던진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면 강물은 점점 멀어져 간다. 세상의 모든 것과 작별하고 모두가 그대로 남아 있는 그곳에서 나만이 멀어져 가는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는 다시 강물이 나에게로 다가온다. 이 영화에서 사건은 강에서 시작하여 다시 강에서 끝나게 된다. 강으로 떠나 보낸 것, 그리고 강을 따라 나에게 온 것은 무엇이었을까?


희진의 마지막 길을 뒤따르는 미자가 그 다리 위에 섰을 때, 미자가 쓴 모자가 바람에 날려 강으로 떨어진다. 아마도 모자는 미자가 지키며 살아왔던 그 어떤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모자가 바람에 날려 희진이가 떨어진 그 곳으로 떨어졌을 때, 미자가 꿈꾸던 아름다운 세상도 함께 떨어졌다. 아름답게 살고 싶었던 미자는 결국 거센 바람에 휩쓸려 추락하고 만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미자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늘 화려한 꽃무늬 옷에 화려한 스카프와 모자까지, 이렇게 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시를 쓰고 싶어하는 미자의 현실은 아름답지 못하다. 간병일을 하며 이혼한 딸을 대신하여 손자를 키우며 살고 있는데, 그 손자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가해 아이들의 부모가 피해자에 대한 죄책감도 없이 아이들의 잘못을 돈으로 덮으려 하는 이야기를 나눌 때 미자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아름다운 꽃을 보러 간다.


마지막으로 합의금을 건넨 미자는 묻는다. “이제 이대로 다 끝난 건가요? 완전히?”

이렇게 묻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은 아무런 반성도 책임도 지지 않고, 이대로 끝나는 건가요? 정말 이대로 끝나도 되는 건가요?”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희진과 겹쳐지는 미자의 마지막 발걸음은 미자가 쓴 시처럼 슬프고도 아름답다. 

미자와 희진의 마지막 발걸음은 이 영화의 시작인 동시에 끝이다. 

이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서 똑같은 모습으로 나에게로 다가오는 강물처럼, 영화의 시작인 희진의 죽음과 영화의 끝인 미자의 죽음, 그리고 희진을 위한 애도와 속죄의 노래인 동시에 미자의 마지막 유언인 시, ‘아네스의 노래’는 그래서 더욱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시를 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시를 쓰려는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렵다. “

잘못에 대해 속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속죄 할 마음을 먹는 것이 어렵다.





아네스의 노래


[미자 목소리]
그곳은 어떤가요 얼마나 적막하나요
저녁이면 여전히 노을이 지고
숲으로 가는 새들의 노래 소리 들리나요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 당신이 받아 볼 수 있나요
하지 못한 고백, 전할 수 있나요
시간은 흐르고 장미는 시들까요

이제 작별을 할 시간
머물고 가는 바람처럼 그림자처럼
오지 않던 약속도, 끝내 비밀이었던 사랑도.

[희진 목소리]
서러운 내 발목에 입맞추는 풀잎 하나
나를 따라온 작은 발자국에게도 작별을 할 시간
이제 어둠이 오면 다시 촛불이 켜질까요
나는 기도합니다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기를
내가 얼마나 간절히 사랑했는지 당신이 알아주기를

여름 한 낮에 그 오랜 기다림
아버지의 얼굴 같은 오래된 골목
수줍어 돌아앉은 외로운 들국화까지도
내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당신의 작은 노래 소리에 얼마나 가슴 뛰었는지.

나는 당신을 축복합니다. 검은 강물을 건너기 전에 
내 영혼의 마지막 숨을 다해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다시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작가의 이전글 독서로 '일에 대한 철학'을 세우는 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