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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May 08. 2020

어제의 적, 오늘의 동행.

영화 <쓰리 빌보드> 리뷰


감독: 마틴 맥도나

출연: 프란시스 맥도맨드(밀드레드), 우디 해럴슨(윌러비), 샘 록웰(딕슨)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목가적인 전원 풍경과 잔잔한 음악으로 시작된다. 흡사 서부극의 시작처럼 카메라는 텅빈 들판을 달리는 자동차를 따르는데 이때 그 자동차의 룸미러에 비친 여자의 눈빛은 텅비고 메말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주목한 것은 길가에 버려진 광고판.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생각에 잠긴 그녀의 모습을 비추던 화면이 전환되면, 긴 머리를 짧게 잘라 뒤로 묶고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그녀가 다시 등장한다. 이전 장면의 연약한 눈빛은 온데간데 없다. 화면을 가득 채운 그녀의 상반신과 (서부극의 주인공 등장에 걸맞은) 배경음악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관객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준다.


경찰 딕슨이 등장하는 첫 장면은 어떠한가.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중간 중간 ‘마오’를 외치는 그 몇초간의 모습으로도 어딘가 조금은 허술하고 모자란 그의 모습이 충분히 설명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광고판을 칠하는 노동자들(히스패닉, 흑인)과의 대화 장면은 단순하고 폭력적이며 약자를 차별하는 경찰이라는 그의 과거를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경찰서장 윌러비는 가족과의 식사 장면으로 처음 등장하는데, 그는 (고교시절에 치어리더를 했을 것 같은 외모의) 금발 미녀인 아내와 아름다운 두딸로 구성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의 가장으로 보인다. 영화속에서 그는 유능함 보다는 ‘사람 좋음’ 에 가까운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의 ‘사람 좋음’은 어쩐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인종차별하는 경찰들을 다 해고하고 나면 동성애 혐오자 두명만 남는다’는 그의 말은 현재의 상황에 대한 구차한 변명으로 보인다. 부하직원을 마음대로 윽박 지를 수 있는 경찰 서장이라는 위치와 함께 여성으로만 구성된 가족 중 유일한 남성이며,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도 욕을 내 뱉을 수 있는 마초적인 남자. 그가 아내에게 쓴 마지막 편지를 통해 아내가 자신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죽음을 설명하긴 했으나, 실상은 그가 약해지는 스스로를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죽음을 앞당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의 초반에 주인공 세명의 이름과 성격이 소개되는데, 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구조이다. 영웅인 주인공을 중심으로 한 영화 즉, 서부극이나 히어로물의 도입부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유사점은 또 있다. 바로 ‘의상’이다. 서부극에서는 주인공 특유의 의상이 존재한다. 그것은 카우보이 모자일수도 현란한 손동작을 가능하게 하는 총일 수도 있다. 히어로물에서도 주인공 만큼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바로 그가 입는 ‘슈트’이다. 슈퍼맨, 스파이더맨, 베트맨 모두 그들의 전용의 의상이 있다. 이 의상을 입기 전의 그들과 입은 후의 그들은 같으나 또 다른 사람이다. 연약하고 쉽게 상처받는 평범한 인간이 ‘슈트’를 입고 나서 영웅이 될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밀드레드의 푸른색 작업복이 마치 히어로물의 ‘슈트’처럼 보인다. 영화에 처음 등장한 그녀와 푸른 작업복을 입은 그녀는 같은 사람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다. 경찰의 조사를 그저 기다리기만 하던 그녀가 푸른 작업복을 입은 후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남의 약점까지 이용하기 때문이다. 


푸른 작업복을 입은 밀드레드는 여성과 남성의 중간쯤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녀가 입은 작업복의 디자인이 일반적으로 남성이 많이 입는 형태이고, 그녀의 머리카락의 절반(아래부분)은 마치 남자의 머리처럼 짧게 깍여 있으며, 나머지 절반은 팽팽하게 당겨서 뒤로 묶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광고판을 계약하러 갈때, 그리고 경찰들과 대면할 때는 작업복을 단단하게 여며서 입지만, 아들과 함께 할때는 상의는 풀어서 벗어 내린다. 이런면에서 그녀의 푸른 작업복은 갑옷 같기도 하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밀드레드가 세운 3개의 광고판의 타깃이던 윌러비 서장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영화가 겨우 중반에 이르러 분노의 대상이 갑작스럽게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의 시작부터 이미 윌러비는 분노의 대상으로는 부족한 점이 많다. 그는 광고판을 세운 밀드레드를 찾아가 자신이 시한부임을 알리며 설득하고자 한다. 폭력보다는 말과 설득에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이런 그는 유능하지 못한 경찰일 뿐 악당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관객이 밀드레드의 편에 서서 윌러비를 비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또한 밀드레드는 딸을 잃은 어머니이지만, 그녀 또한 동성애자와 장애인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고 자신에게 비난의 말을 하는 치과의사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밀드레드를 전적으로 지지하기 어려운 지점이다. 영화 초반 무능하며 인종차별주의자에 어설픈 경찰로 보이던 딕슨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또 다른 사람으로 변모한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속 어느 누구에게도 쉽사리 감정이입 할 수 없다. 영화속에는 정의와 불의, 선의와 악의가 온통 뒤섞여 있다. 영화 오프닝에서 처럼 온통 안개에 뒤덮여서 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것을 겨우 볼 수 있을 뿐, 그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영화 초반 의욕없이 문제만 일으키던 딕슨은 그가 아버지처럼 따르던 윌러비가 죽고 경찰 제복을 벗은 뒤에 오히려 새로운 사람이 된다. 그에게 영향을 주던 윌러비가 죽고 난 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다. 경찰서에서 윌러비가 사라지고 집에서 늘 그를 조정하던 어머니가 (마치 죽은 것 처럼) 잠든 뒤 그는 스스로 움직이기로 결정하고, 밀드레드에게 전화를 한다.


이미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던 밀드레드와, 딕슨은 그때서야 동행이 가능해 진다. 


그와 동행하기로 결정한 밀드레드는 할말이 있다면서 ‘경찰서에 불을 지른게 나였다’고 고백한다. 그녀는 그 고백에 사과의 말이 덧 붙이지는 않는다. 이런 밀드레드를 보며 딕슨은 “ 뻔한 소리를 하고 그러냐”고 가볍게 대꾸한다.  

그의 대답 후에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밝게 웃는 밀드레드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그들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가면서 결정”하기로 한다. 


앞으로 그들이 어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화면을 가득 채운 밀드레드의 웃는 얼굴과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 화창한 날씨처럼, 그들의 앞날이 밝기를 바랄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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