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전작 읽기 두 번째
법 앞에서 (프란츠 카프카, 전영애 옮김(민음사))
[목차]
법 앞에서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
작은 우화
굴
인디언이 되려는 소망
황제의 전갈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
프로메테우스
일상의 당혹
판결
양동이 기사
나무들
굶는 광대
그
민음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카프카의 총 14편의 단편을 모은 책이다.
그중 첫 번째 수록된 단편이자 이 책의 제목인 ‘법 앞에서’는 한 시골 사람이 법으로 통하는 문을 지키고 있는 문지기에게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하고, 문지기는 지금은 들어갈 수 없다고 대답한다. 시골사람은 여러 해 동안 기다렸으나,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임종을 맞게 된다.
이 단편 속 ‘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문지기’가 누굴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한 많은 의견이 있다. 시골사람은 카프카 자신을 의미하고, 문지기는 그의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가정하면, 법은 카프카가 그토록 원했던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단편을 카프카 개인의 자전적인 글로만 축소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시골사람이 처음 문지기 앞에 섰을 때 문지기는 ‘자기는 최하급 문지기에 불과하고, 갈수록 막강해서 세 번째 문지기만 되어도 나조차도 쳐다보기도 어렵다(P7)’고 하였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그는 다른 문지들은 잊어버리고, 이 첫 번째 문지기가 법으로 들어가는 데 있어서 단 하나의 장애라고 생각한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문지기를 여러 해 동안 살펴보다 보니 외투 깃 속에 있는 벼룩까지도 알아보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벼룩에게까지 자기를 도와 문지기의 기분을 돌려 달라고 청한다(P8).’
이렇듯 시골 사람은 처음에는 ‘법’으로 가기 위해서 문 앞으로 왔지만 어느새 그는 ‘법’은 잊어버리고 그저 문지기를 통과하는 것에만 마음을 쓰게 된다. ‘법’을 우리 삶의 목표라 고 생각하고 책을 읽다 보면, 시골사람의 모습은 목적지로 향하는 여정 중에 손쉽게 눈앞의 일에 마음을 빼앗기는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게 보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진정 소중한 것들은 얼마나 쉽게 잊히는가.
책에 수록된 다섯 번째 단편인 ‘굴’은 어떠한 생명체가 자신이 안전하게 쉴 수 있는 ‘굴’을 파는 이야기이다. 굴이 그에게 어떤 의미이며,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었고, 또 적으로부터 그 굴을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를 쓰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표현한다.
처음에 굴은 그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갈수록 그는 굴을 위해 자신의 시간과 살과 피와 모든 것을 다 내어놓게 된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나를, 내가 원하거나 내가 이곳의 삶에 지쳤을 때 나를 자기한테로 부를 것이고, 그는 또한 내가 그 초대를 거역할 수 없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이곳에서의 이 시간을 남김없이 다 맛보고 근심 없이 보낼 수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다. 굴이 나를 너무도 바쁘게 한다.(P51)”
굴속에서 마침내 안식을 취하려는 순간 변함없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울리는 ‘사각사각’하는 소리는 그를 괴롭힌다. 그 소리를 없애려는 어떠한 노력도 효과가 없다. 그 소리는 안전에 대한 과한 망상에 사로잡혀 들리는 환청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 흐르는 소리로 들렸다. 내가 아무리 나만의 왕국을 건설한들 시간은 피할 수 없다. 시간은 온 사방에서 쉬지 않고 ‘사각사각’ 규칙적으로 나를 옥죄어 나간다. 바쁘게 일하며 움직일 때는 잠시 시간을 잊을 수 있지만 한자리에 가만히 누우면 시간이 쉼 없이 흘러감을 느낄 수 있다. 시간은 그 무엇보다 힘이 세다. 카프카는 아마 자신이 건축한 글이라는 세상 속에서 시간이 그의 짧은 생을 째깍거리며 쫓아오는 것을 알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