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라진 시간] 리뷰
감독:정진영
출연: 박형구(조진웅), 정해균(정해균), 김수혁(배수빈),
윤이영(차수연),초희(이선빈)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작은 시골마을 초등학교 선생님인 수혁과 그의 아내 이영은 말 못 할 비밀을 가지고 있다. 밤이 되면 이영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녀는 해리성 인격장애를 앓고 있다. 그들은 비밀을 알게 된 마을 사람에 의해 밤 시간 동안 집안에 감금되고, 잠든 사이 발생한 화재로 인해 부부 모두 사망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형사 형구가 화재 현장을 방문한다. 영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었을 때는 마을 사람의 비밀을 파헤치는 형사의 이야기로 보인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의 강권에 의해 술에 취해 불이난 집에서 잠이 들고 아침에 깨어난 형구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닌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다. 앞서의 사건들은 마치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 양 불에 탔던 집은 멀쩡하고, 수혁이 맡았던 반은 이제 선생님이 된 형구가 맡고 있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선생님으로 알고 있고, 그가 전에 살던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다.
관객들은 이제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그가 형사였던 시간이 꿈 또는 환상인지, 그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선생님으로 알고 있는 이 시간이 꿈인지…
형구는 형사 시절에 대한 기억을 진실로 생각하고 꿈에서 깨기 위해, 정해균과 그의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지만, 비닐하우스만 불에 탔을 뿐 해균은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쯤에서 형구가 사람을 죽여서까지 되찾고자 하는 ‘사라진 시간’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형구는 ‘형사’였던 과거가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고 생각하고 그걸 되찾으려고 하지만, 어쩌면 사라진 것은 ‘형사’ 시절이 아닐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과거가 현재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그 시절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형사 시절은 그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기 때문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의 현재 모습을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사라진 것은 그가 선생님이었던 과거로 볼 수 있다.
선생님이었던 수혁과 인형을 만들던 이영의 과거 모습들은 형구의 현재와 연결된다. 마을 사람들과 학생들은 그를 선생님으로 대하며, 온천에서 우연히 만난 초희는 인형을 만들던 그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교실 사물함에 뭐가 있는지 묻는 형구에게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프라이버시는 지켜주세요’라는 진규의 대답은 영화 초반에 등장한 수혁의 모습을 상기시키며, 수혁이 형구의 사라진 과거임을 깨닫게 한다.
과거에 대한 기억이 없는 형구와는 달리 영화 초반에서 우리는 이미 수혁과 이영의 모습을 보았기에, 우리의 기억 속에 그 시간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 우리에게 그의 과거는 사라지지 않았고 연속적이다. 기억의 불균형이 일으키는 효과로 나는 이야기의 순서를 재조합해보고 싶어 진다.
영화 속에서 어떤 사건을 먼저 보여 주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결이 달라진다. 이 영화는 발생하는 사건을 기준으로 3부로 나눌 수 있다. 1부는 수혁과 이영의 모습을, 2부는 화재 사건이 일어난 뒤 조사를 위해 마을을 찾은 형사 형구의 모습을, 3부는 화재가 난 집에서 잠이 들었다가 잠에서 깨어난 선생님 형구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준다.
만약 현재의 편집 순서를 조금 바꾸어 3부를 가장 먼저 보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느낌을 받게 될까? 우리가 형구의 모습을 어떻게 보았는지에 따라 그의 과거에 대한 선명도가 달라질 것 같다. 형사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던 원래의 편집과 달리, 선생님의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면, 그가 찾아 헤매는 기억은 꼭 형사 시절로 한정해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3부의 마지막 엔딩 장면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듯한 그의 공허한 표정과 흔들리는 눈빛은 다시 오프닝의 장면으로 연결되며, 자신을 찾는 형구의 여정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
종국에는 그가 찾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끝이 없이 이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