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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Apr 10. 2021

운명이 부르는 소리

영화 [운디네] 리뷰



개봉: 2020.12.24.

감독: 크리스티안 펫졸브

출연: 파울라 베어(운디네), 프란츠 로고프 스키(크리스토프), 마리암 자리(모니카), 야콥 마트 슈 엔츠(요하네스), 마리엄 자리(모니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운디네의 사랑은 언제,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우리는 운디네와 요하네스의 사랑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도착한 것은 그들의 이별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별은 ‘만나야 해’와 ‘우리 보자’의 중간쯤 에 위치한다.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쉽게 잊힌다. 운디네는 ‘커피를 다 마시면 나는 떠나야 해’ 라며 간접적으로 이별을 고한 요하네스에게 자신을 떠나면 죽는다고 경고하지만,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떠난다.


[영화 운디네-스틸컷]


그를 찾아 다시 카페로 되돌아온 운디네는 카페의 수족관 물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운명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녀가 잠시 멈추어 선 그때, 박물관의 관람객 중 한 명이었던 크리스토프는 운디네에게 커피 한 잔 하자고 권했으나 이를 거부하는 듯한 그녀의 굳은 표정을 보고 사과하며 뒷걸음질 치다가 장식장에 부딪히는데, 그가 일으킨 진동이 수족관을 뒤흔들어 놓더니 결국 파괴한다. 크리스토프에게 수족관의 파편들이 쏟아져 내리는 위험천만의 순간, 운디네는 팔을 뻗어 그를 구해 낸다. 마루 바닥으로 함께 쓰러진 그들 위로 수족관 속 물과 수초들이 파도치는 듯이 쏟아져 내리는데, 그들의 모습은 마치 물속에서 뭍으로 탈출한 것처럼 보인다. 물의 정령인 운디네와 인간이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물속에서 보내는 크리스토프는 그렇게 뭍으로 한발 내딛게 된다.


이 장면에서 수족관은 운디네에게 정해진 운명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각의 유리상자 속에 안온하게 가꾸어진 환경, 아름답게 보이지만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숨 쉴 수 있는 운명의 제약. 그런 수족관을 뒤흔들고 깨뜨린 사람이 바로 크리스토프이다. 크리스토프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은 것은 운디네였지만, 실은 운명의 틀에 갇혀 있던 운디네가 주어진 운명을 깨트릴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 크리스토프였던 것이다.  


[영화 운디네-스틸컷]


그렇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 운명을 거스른 운디네를 단죄하듯이 그녀는 두 번째 사랑을 물에게 빼앗길 위험에 처한다.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 보았을 때 자신을 부르는 운명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되살리기 위해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로 결정한다.



[영화 운디네-스틸컷]


운디네가 요하네스를 죽이고 스스로 물속으로 들어간 순간 물거품이 생성되는데, 그 물거품은 그대로 사라지는 대신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고, 그 순간 뇌사 상태에 있던 크리스토프가 깨어난다. 마치 물속에서 산소를 공급받지 못해 뇌사 상태에 빠진 크리스토프에게 운디네가 생명의 숨을 불어넣은 것 처 럼 말이다. 

잠수한 상태에서 날숨을 내뱉을 때 입에서 시작한 공기 방울이 수면 위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역으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이 장면은, 마치 익사 직전에서 구조된 사람처럼 깨어나는 크리스토프의 모습과 연결되면서 그를 되살린 것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려준다. 크리스토프가 물에 빠진 운디네에게 stayin’ alive 노래 박자에 맞추어 심장마사지를 하고, 숨을 불어넣었을 때 운디네가 눈을 뜬 것처럼 운디네가 크리스토프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그 순간 그가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영화 운디네-스틸컷]


운디네는 주어진 운명에 굴복하여 요하네스를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살리기 위한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그녀를 그리워하며 물속으로 들어온 크리스토프의 손에 그가 선물로 주었던 산업 잠수사 모형을 쥐어 주며, 그를 다시 현실로 되돌려 보낸다. 


이제 운디네는 더 이상 영혼이 없는 존재가 아니며, 사랑하는 남자를 통해 완성되어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영혼을 갖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그가 떠나면 그의 죽음으로 대가를 치르게 한 뒤 다시 물로 돌아오는’ 그동안 무수히 반복해 왔던 운명에 따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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