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떤 여자들] 리뷰
개봉: 2016.
감독: 켈리 라이카트
출연: 로라 던(로라), 미셸 윌리엄스(지나), 크리스틴 스튜어트(베스), 릴리 글래드스톤(제이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미국의 몬태나 주.
라디오 방송에서 ‘개 밥그릇의 물이 얼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말로 추운 날씨에 대해 경고를 해 준다. 나에게는 낯선 지명이라 지도에서 위치를 찾아보았다. 미국의 북서부, 캐나다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겨울엔 알래스카와 비슷한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고, 넓은 면적에 비해 인구가 적은 곳이다. 농장과 방목 지대가 전체 면적의 ⅔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주거지가 있다. 영화는 몬태나 주에 거주하는 여성의 삶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담고 있는데, 그녀들의 삶은 춥고 황량한 주변의 풍경만큼이나 쓸쓸하다.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 속에서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은 열망이 있으나, 그녀들의 시도는 거부당하고 씁쓸한 뒷맛만 남는다. 그녀들의 평범한 일상을 그대로 담은 것 같은 영화이지만 유독 기억에 남는 몇 장면들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로라는 연인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발끝으로 그를 유혹해보지만,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뒷모습을 보인다. 로라는 자신의 옷 색상이 (사랑스러운) 피치색이냐고 묻고 그는 (칙칙한) 토프색이라고 대답한다. 두 사람은 같은 방 안에서 마주 보고 앉아 이 대화를 나누는데, 둘의 모습을 화면에 담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남자가 앉은 쪽 뒤 벽면에 걸린 작은 거울을 통해 로라의 얼굴을 보여주는데, 거울은 화면의 오른쪽 상단의 귀퉁이에 작게 위치하여, 같은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둘의 모습을 마치 하나의 면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 것 같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벽을 등지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앉은 남자의 얼굴과 같은 평면에 로라의 얼굴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면의 구도가 어딘가 익숙하게 느껴져서 가만 생각해 보니, 스카이프와 같은 영상통화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그들이 함께 있는 순간은 현실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연결된 상태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연출되고 있다. 어쩐지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관계처럼 느껴졌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로라를 ‘내 변호사’라고 부르는 풀러가 그녀에게 바라는 것은 변호사로의 역할이 아니다. 그는 ‘추가 배상은 불가능하다’는 로라의 법률 조언을 8개월 동안 수긍하지 않다가, 동일한 말을 남자 변호사가 하자 바로 받아들인다. 그가 그녀에게는 바라는 것은 변호사라기보다는 마치 상담사였던 것처럼 신세 한탄을 하고 울음을 터트리며, 위로받고자 한다. 그는 결국 인질극을 벌이면서도 로라를 부른다. 협상 전문가가 아닌 변호사를 총기를 든 인질범에게 보내면서 핸드폰 하나 쥐여주고 그녀가 사건을 해결하기를 기다리는 경찰들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다. 로라가 변호사로서 겪는 경험들을 보면서 사회에서 여성에게 기대하는 모습들이 어떠한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지나는 가족 중 가장 무거운 짐을 든 사람이다. 남편과 딸은 둘만의 대화를 나누고 웃음 짓지만 거기에 지나의 자리는 없다. 그녀는 ‘정말 열심히 일하고 가족을 위해 많은 것을 해주는’ 사람이지만, 그녀의 소용은 ‘없으면 나머지 가족들이 불편해지는’ 정도인 것 같다. 지나는 새로 지을 집의 이웃에 사는 알버트에게 앞마당에 방치된 사암을 팔라고 설득하려고 한다. 평소에 알버트와 말이 잘 통하는 남편에게 이 일을 부탁하지만, 남편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을 뿐, 사암에 대해서는 입을 떼지 않고, 답답한 지나가 알버트에게 ‘사암을 팔 생각이 있느냐고’ 질문을 하자,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것처럼 행동한다. 마치 지나가 없는 사람인 양 그녀의 질문들은 스쳐 지나가고 알버트의 답변은 그녀의 남편에게로 향한다. 남편과 같은 명함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은 같은 사업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가 직원으로 등록되어 있다는 알버트의 말을 듣는 순간, 사회에서 어리다는 이유로 또는 여자라는 이유로 투명 인간이 되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지나에게도 실제로는 사장의 역할을 하면서도 명함에 직원으로 등록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대화 중 보여준 알버트의 행동은 상당히 무례한 것이었음에도 남편은 그 무례를 지적하기보다는 알버트에 대한 쓸데없는 배려심을 보여준다. 그의 연민과 배려는 가족인 아내가 아니라 전혀 관련 없는 남을 향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 하루 종일 말과 함께 농장에서 지내는 제이미는 우연히 만난 법학 강사 베스에게 푹 빠진다. 베스가 강의하는 수업을 듣고 수업이 마치면 저녁을 먹는 동안 말 상대가 되어 준다. 그 시간들은 아마 제이미의 하루 중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일 것이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그리고 남은 겨울 내내 새로운 일이 없을 것이 분명한 그녀에게 그 순간들은 정말 소중하고 반짝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제이미는 돌아갈 길이 멀어 농장 구경할 시간이 없다는 베스를 위해 자신이 돌보는 말을 데리고 와서 태워준다. 자신이 탄 말 뒤에 베스를 태운 제이미의 뿌듯한 표정은 그녀의 등 뒤에서 후광처럼 쏟아지는 빛처럼, 눈부시게 밝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늘 각자의 차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하였던 그들이 하나의 말을 타고 함께 걸을 때 조금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런 베스가 갑자기 강의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자, 그날 밤 제이미는 베스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까지 운전을 한다. 카메라는 운전을 하는 제이미의 얼굴 대신 자동차가 달리고 있는 어두컴컴한 도로를 비춘다. 어째서 베스를 만날 희망과 기대감에 찬 제이미의 얼굴을 보여주는 대신 한참 동안 도로를 보여주는 것일까? 그 길은 매번 강의를 위해 베스가 지나왔던 길이다. 베스에게로 가는 제이미의 마음 위로 막막했을 베스의 마음이 겹쳐서 보였다. 자신의 실수로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던 장소에서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으로 생각했던 베스와 달리 제이미에게는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인연이었다.
세 가지 에피소드가 전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느슨한 연결점이 있었다. 로라의 연인은 지나의 남편이고, 지나가 차를 타고 지나가는 길은 베스(그리고 제이미)가 강의를 위해 왕복하던 길이다. 그리고 제이미가 베스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에서 찾았던 법률 사무소는 로라가 근무하는 곳이다. 세 여성들은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으나 같은 공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런 우연한 연관성 외에도 누군가를 돌보는 일상을 계속하고 있으나 여전히 응답받지 못한다는 점이 어쩌면 그들의 가장 닮은 점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