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믹의 지름길] 리뷰
2010년 제작
감독: 캘리 라이카트
출연: 미셀 윌리엄스(에밀리), 브루스 그린우드(믹), 윌 패튼(솔로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믹의 지름길]은 서부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마차를 이끌고 서부로 이주하려는 세 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길잡이로 ‘믹’을 고용하고, 믹은 자신만이 아는 지름길로 그들을 안내하는데, 결국 길을 잃고 갈증과 굶주림으로 서서히 지쳐간다.
영화의 소개 글에는 장르가 ‘서부극’으로 표시되었다. 서부극에 친숙하지 않은 나는 어떤 영화를 서부극으로 표시하는지 궁금해졌다. 두산 백과사전에 따르면 ‘서부극의 기본적인 사상은 남성적인 개척자 정신의 강조 또는 찬미이고, 영화로서의 최대 매력은 총격이나 격투의 액션과 스피드, 거기에 광대한 자연 풍토가 주는 소박한 해방감 등이다.’로 정의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이러한 서부극의 특징을 찾을 수 있을까?
영화 속 남성들에게서 강인한 개척자 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길을 잃은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고 불안해한다. 그리고 넓은 초원의 풍경을 4:3 비율로 촬영하여, 러닝타임 내내 우리는 광대한 자연의 풍광을 볼 수 없다. 대신 척박한 자연 속에 갇힌 인간들의 지친 표정과 바닥을 드러내고 갈라진 땅을 볼 수 있을 뿐이다. 넓은 자연 속을 질주하기보다는 한발 한발 걸어 나가야 하는 사람에게는 넓은 초원이 해방감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감옥에 갇혀서 옴짝달싹 못하는 답답함이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영화 속에 액션 장면은 존재하지 않는다. 액션이라고 불릴 만한 장면은 믹과 솔로몬이 인디언을 잡으러 떠난 순간일 텐데, 이때 카메라는 그들이 어떻게 인디언을 붙잡았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그 대신 떠난 그들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지루하게 기다리는 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서부극이라기보다는 서부극의 정반대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는 남성들의 모습보다는 고단한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나가는 여성들을 보여준다. 그녀들의 손은 늘 바쁘다. 저녁이 되면 텐트를 치고 빨래를 털어서 말린다. 땔감을 주으러 다녀야 하고, 얼마 남지 않은 물을 조금씩 아껴서 저녁식사를 준비한다. 카메라는 이런저런 노동을 하는 여성의 손을 자주 보여준다. 시커멓게 때가 묻고 잠시도 쉴 틈 없이 바쁜 그녀들의 손은 일반적인 서부극에 등장하는, 현란하게 총을 돌리는 카우보이의 손에 대비된다. 말고삐를 쥐고 총을 든 남자들의 모습 뒤에는 그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하고 편안히 쉴 잠자리를 준비하는 여성들의 노동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들은 항상 남성들의 뒤에 서 있다.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 모르는 것은 남자던 여자던 마찬가지지만, 길잡이가 되는 것은 남성이며, 여성들은 그 뒤를 따른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는 것도 남자들끼리 의논한다.
이러한 구도가 깨지게 되는 것은 인디언이 붙잡히는 순간이다.
믹은 인디언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솔로몬은 인디언을 이용해 물이 있는 곳을 찾으려고 한다. 믹은 인디언이 잔인하고 미개한 종족이라고 생각한다. 믹에게 인디언은 전혀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여자는 혼돈으로부터 생겨났다는 믹의 말에 따르면 그에게는 여자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는 존재인 것 같다. 그는 인디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에밀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를 한다. 마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어린이를 대하듯이 말이다. 그렇지만 에밀리는 인디언에게 음식을 나누고 뜯어진 신발을 고쳐준다. 더 이상 믹의 경고를 따르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믹과 여자들이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는 모습은 마치 우리가 번역되지 않은 인디언의 말을 마주할 때와 비슷하다. 영화 속 인디언의 언어는 의미화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마치 배경 음악처럼 그냥 소리로서 존재할 뿐이다. 마치 새의 지저귐이나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처음에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하며 보던 관객들은 결국 그를 그 장소의 즉 자연의 일부분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물을 찾아 인디언의 뒤를 따르다 가파른 언덕을 마주한 그들은 마차를 하나씩 내려 보내기로 한다. 첫 번째 마차가 무사히 내려갔을 때, 믹은 거들먹거리는 자세로 언덕 위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꼬마야, 저기 가 있어라. 그늘에서 쉬고 있으면 다 끝나고 찾으러 가마’ 일행 중 어린아이인 지미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카메라는 지미가 아닌 인디언의 모습을 비춰준다. 마치 믹이 인디언을 ‘꼬마’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다. 결국 마지막 마차의 줄이 끊어지며 비탈을 굴러가는 순간 인디언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피식 웃는다.
믹은 실패한 일의 책임을 인디언에게 돌리며 그를 죽이겠다며 총을 겨누고, 에밀리는 그런 믹을 저지하기 위해 그에게 총을 겨눈다. 길잡이로 고용되었으면서도 길을 잃어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고, 길을 잃은 뒤에도 뻔뻔한 태도로 일관하던 믹을 막아서는 것이다. 그동안 매일 밤 남자들이 믹을 어떻게 처리할지 말로만 떠들어대었으나, 결국 행동에 나선 것은 에밀리였다.
마침내 발견한 나무는 곧 물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믹은 마침내 에밀리를 인정한다. 희망의 상징인 나무 가지의 틈 사이로 보이는 에밀리의 얼굴은 그들의 희망이 어디에서 오는지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장면에 이어서 나무 틈 사이로 보이는 원경의 인디언의 모습이 에밀리의 시선 숏으로 보이고, 이어서 나무 틈 사이로 에밀리의 얼굴 정면이 클로즈업된다. 숏과 리버스 숏으로 구성된 이 장면은 마치 에밀리와 인디언 간의 말 없는 대화의 모습처럼 보였다. 그러나 과연 멀리 떨어진 인디언이 나무 뒤에 서 있는 에밀리의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그들의 시선이 정말 마주쳤을까? 그렇다면 이 장면을 여성과 인디언의 대화의 장면으로 보고 싶은 것은 아마도 나의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여성이 희망이 되고, 언어의 장벽 앞에서도 마음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런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캘리 라이카트 감독의 새 영화 [퍼스트 카우]가 개봉하였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기 전에 쓴 글이라, 퍼스트 카우를 본 뒤에 이 글이 어떻게 보일지 저도 궁금하네요.
주말에 영화를 보고 나서 혹시 덧붙일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