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종착역] 리뷰
개봉: 2021년
감독:권민표, 서한솔
출연: 설시연, 배연우, 박소정, 한송희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 [종착역]은 열네 살 소녀들의 모험을 담고 있다. 열네 살이라는 나이는 오묘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여름방학을 맞은 중학생. 아이들은 어린이를 막 벗어나서 청소년의 문턱에 서 있다. 이 나이대는 친구가 제일 소중한 시기이지만 친구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마냥 즐겁지 만은 않다. 친구를 만들고 그 친구 관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중생들의 친구 관계는 미묘한 점이 있어서 또래와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면서 혼자되는 것이 두려워 무리를 만들고, 이미 만들어진(친해진) 그룹에 뒤늦게 들어가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새로 전학 온 시연이 처음 사진 동아리실에 들어갔을 때, 바닥에 떨어뜨린 콘택트 렌즈를 찾는 아이들을 위해 핸드폰 불을 켜서 비춰주는 작은 행동도 아마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처음에 셋이었던 동아리는 시연이가 들어오면서 네 명이 된다. 예민한 관계 속에서 셋은 불안정하다. 둘이서 잡담을 하면 한 명은 꼭 소외되기 마련. 시연의 합류로 아이들의 관계는 더욱 안정되어 가는 것처럼 보인다.
동아리의 여름 방학 숙제로 ‘세상의 끝’을 찍으라는 주제를 받고, 아이들은 1호선의 끝, 신창역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아이들끼리만 가는 낯설고 먼 길에서 주고받는 이야기 들은 두서없고 통통 튀지만 아이들에게 착 붙어 있다. 아무 이유 없이 심각했다가 또 특별한 이유 없이 깔깔 거리는 아이들은 딱 그 나이 때 아이들의 모습 그대로 여서 좋았다. 두 아이가 대화를 나눌 때 마치 배경음처럼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가 수시로 끼어든다. 소리가 겹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비껴 나가기도 한다. 어른들이 쓴 대본이라면 이럴 수 없을 텐데 라는 생각에 찾아보니 영화 속 대사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애드리브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영화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이들이 무더위 쉼터에 처음 등장하는 것이다. 카메라는 건물 안쪽에서 활짝 열린 출입구 쪽을 비추고 아이들은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우리는 건물 밖에서 손을 씻는 아이들의 대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아이들의 모습은 볼 수 없다. 카메라의 시선은 망설이는 아이들을 진득하게 기다려주는 할머니의 시선처럼 보인다. 마침내 시연과 송희가 건물 안으로 들어와 물을 마실 때도 물을 마시는 아이들 대신에 입구에 서 있는 아이들을 보여준다. 쉼터를 떠났다가 되돌아오기를 반복하던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연우와 송희,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자고 가야겠다는 시연과 소정으로 나뉘어 속 깊은 대화를 나눈다. 아이들은 마침내 그곳에서 밤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함께 모인 넷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있었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꺼내어 본다.
딱 이맘때의 아이를 키우는 나에게 이 영화는 픽션이라기보다는 다큐에 가깝게 보였다. 지루한 지하철에서 ASMR 먹방을 본다던 지,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벤치에 졸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나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은 놓쳤을 법한 아이들의 사소한 대화도 나의 귀에는 쏙쏙 들어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리는 아이들은 아주 작은 실수에도 큰소리로 서로에게 “미안해” 라며 신속하게 사과하고,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으러 가는 길에 기꺼이 동행한다. 아이들이 함께 하는 시간들은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모습이었지만 그들이 찍은 사진처럼 작고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소중한 순간들을 한 번씩 꺼내어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