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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Jan 20. 2022

이상과 현실사이 -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민음사]

이상과 현실 사이





증권 중개인 생활을 하다가 서른다섯의 나이에 화가가 된 폴 고갱의 생애를 모델로 하여 쓰인 책이다. 젊은 작가인 화자가 스트릭랜드와 만났던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사후에 서술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우연히 알게 된 스트릭랜드 부인의 부탁으로 갑작스레 집을 나간 스트릭랜드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역할을 맡게 된다. 파리까지 찾아가 다시 가족을 책임지도록 설득하였지만 실패한다. 스트릭랜드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스트릭랜드에게 받은 인상을 서술한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 부분을 통해 스트릭랜드를 비난하는 우리의 사고의 프레임이 어떻게 생성되었고 작동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온몸에 기름을 바른 레슬링 선수처럼 도무지 붙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자는 도덕의 한계를 넘어선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이런 인간을 상대로 양심에 호소해 보았자 효과가 있겠는가.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었다. 나는, 양심이란 인간 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을 문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된 것이다. 그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왜냐하면 사회의 일원이 된 사람은 그런 사람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행위가 불러일으킬 비난에 정말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무서운 사람을 피해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치 인간이랄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고 뒷걸음치듯.(P76-78)



스트릭랜드에 대한 독자들의 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족을 버린 비정하고 이기적인 사람. 아니면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천재 예술가. 


그렇지만 나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회가 부여한 책임이나 양심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가? 남의 비난이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산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것인가? 어떤 이들은 진실한 애정으로 스트릭랜드를 보살핀 스트로브를 배신하고 그의 아내 블란치와 불륜을 저질렀으며, 블란치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들어 그를 비난한다. 그러나 스트릭랜드의 말처럼 스트로브는 어려움에 처한 자를 돕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성격이며, 블란치는 그녀의 욕망에 충실했다. 그들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것일 뿐이었다. 어떤 이의 욕망은 사회적 잣대에 부합하였고 다른 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 사회적 잣대라는 것 또한 시대와 사회에 따라 달라지는 점을 감안하였을 때 스트릭랜드가 이기적인 행동을 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안정적인 직업과 가족을 버린 그는 과연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천재 예술가인가? ‘희생’이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는 데에서 나온다. 그러나 스트릭랜드가 가진 모든 것들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이었다. 안정적인 삶, 가족, 따뜻한 음식, 편안한 잠자리는 그가 그림을 위해 포기했다기보다는 애초에 그에게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그의 생존은 그런 것들을 토대로 하지 않는다. 그는 오직 그림을 그리는 것, 그것만이 생존의 필수조건이었다. 이런 스트릭랜드에게 ‘희생’이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오히려 그림에 중독된 상태로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화가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그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제목인 ‘달과 6펜스’에서 달은 그의 이상 즉, 화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의미하고, 6펜스는 현실, 증권 중개인으로 가족을 부양하던 삶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달과 6펜스’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묻는 질문은 토론 논제로 흔히 사용된다. 그렇지만 달은 이상, 6펜스는 현실로 단순히 치환해도 되는 것일까? 



달은 하늘에 있을 때(나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을 때) 아름답다. 어두운 밤에 길동무가 되기도 하고 추운 겨울밤을 따뜻하게 비춰주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달이 현실이 되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답지만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달은 그저 하늘에 높이 떠 있어 바라보는 것으로 족하다. 스트릭랜드는 이렇게 말한다. 

어리석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아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P76)


과연 스트릭랜드가 화가가 된 것이  ‘달과 6펜스’ 중 달을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 


아니,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살아낼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화가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스트릭랜드에게는 화가가 되는 것이 ‘이상’이 아닌 ‘현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이 그린 그림의 가치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도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바로 그의 매일의 일상이었기에...


어쩌면 이 소설은 ‘이상’을 추구하는 삶을 위대하게 추켜세우기보다는 매일을 살아가는 6펜스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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