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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쟈 Feb 04. 2023

R의 공포

영화 [레베카] 리뷰




개봉: 1940년

감독: 알프레드 히치콕

출연: 로렌스 올리비에(맥심), 조안 폰테인(드윈터 부인), 

주디스 앤더슨(댄버스 부인), 조지 샌더스(잭 파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베카는 히치콕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다. 데프니 듀 모리에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책과 영화가 동일하다. 또한 영화 속 화자는 끝까지 이름이 나오지 않으며, “이분”, “너” 등의 대명사로 지칭된다. 이름이 없는 그녀는 영화 속 다른 여성과 달리 특별한 캐릭터도 없다. 취미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으나, 그녀와 맥심의 데이터 첫날 스케치 여행에서 보여지는 그림 솜씨도 대단치 않다. 그저 가난하고 순박하고 어린 아가씨 정도로 설명할 수 있겠다. 




영화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레베카는 물론, 초반에 잠시 등장하고 사라진 밴 호퍼 부인마저도 캐릭터가 강렬한데 어째서 주인공인 그녀는 이토록 흐릿하게 만들었을까? 그녀의 서사는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그저  두 번째 드 윈터 부인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영화 초반에 이름이 없던 그녀가 맥심과의 결혼을 통해서야 “드 윈터 부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드 윈터 부인”으로만 존재한다. 





어리고 세상물정 모르던 순진한 아가씨의 성장 영화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나는 어쩐지 성장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정말 성장 영화라면 결국 자신의 이름을 찾아야 하는데, 그녀는 끝까지 드 윈터 부인에 머물러 있다. 한편으로는 그녀가 정말 세상물정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가 맞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했다. 맥심에게 자신과 다른 세상의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맨덜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걱정된다는 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 맥심에 대한 사랑의 지분 중 “맨덜리”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생계를 위해 밴 호퍼 부인의 고약한 성미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던 한 가난한 미국 처녀는 결혼을 통해 대저택 맨덜리의 안주인이 되었다. 순박하다기보다는 영리한 처녀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법정에서 맥심이 곤란에 처하자 기절한 척하여 그를 구해내던 모습을 떠올려 보라.)





물론 행복한 신혼의 모든 순간에는 맥심의 전 부인인 레베카의 그림자가 함께 한다. 영화 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레베카는 차갑게 바라보는 댄버스 부인의 눈 빛 속에, 모닝 룸의 전화번호부에, 모든 물건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는 레베카의 침실에, 그리고 그녀를 레베가가 죽음을 맞은 장소로 이끄는 재스퍼에게도 존재한다. 



마치 유령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는 “R” 마크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큰 키에 검은 머리, 놀랄 만큼 아름답고 우아한 여자라는 표현으로 묘사되는 레베카는 영화를 보는 관객들 각자에게 다른 모습으로 상상될 것이다. 이름만으로 존재하는 여자와 이름이 없는 여자의 대결은 결국 댄버스 부인에 의해 멘덜리의 모든 것이 불태워지면서, 이름 없는 여자의 승리로 끝난 것 같다. 맨덜리에 도착한 첫날, 마치 그녀의 미래처럼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져서 물에 빠진 생쥐꼴을 했던 그녀는 어느새 남편을 위기에서 구해내는 “드 윈터” 부인이 되어 있다.




 

사족으로 댄버스 부인이 죽음까지 불사할 만큼 레베카에게 충성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레베카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정성을 들여 가꿔왔던 맨덜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기 싫은 마음이 그곳을 파괴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달콤한 로맨스 장면에서도 짙게 드리워진 죽음의 냄새와 어쩐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음악은 남녀 간의 평범한 사랑을 허락하지 않는 히치콕의 영화다웠다. 별다를 것 없는 “R”이라는 문자를 이토록 공포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감독이 또 있을까? 80년 전 영화가 이토록 완성도 높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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