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영국 역사학자 에드워드 핼릿 카(Edwrd Hallett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 (What Is History?). 켐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강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1961년에 출간되었고 이 책으로 E.H Carr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역사란 무엇인지에 대한 Carr의 답변을 시작으로 '역사'가 되는 것 - 역사로 기록되기 시작하는 것 - 은 무엇인지? 역사로 기록되는 것의 조건, 역사가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에 대한 사상적 기틀을 마련한 고전이 되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 그가 얘기하는 대화란 무엇일까? 역사가는 바로 지금 존재하는 사상을 가진 인간이며, 인간은 과거에 대한 '사건', 그리고 그 많은 사건들 중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건에 대한 '선택', 선택된 사건에 대한 많은 사료를 바탕으로 가장 근접한 '객관성', 그리고 그 사건에 대한 사람의 '평가'가 네 가지가 끊임없이 순환되는 게 바로 대화의 한 모습이다. 이 네 가지중 어느 하나가 결함이 있을 경우 그 결함을 메꾸기 위한 노력, 예를 들면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새로운 증거자료,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허구였다는 증거자료, 실제 일어난 사건이긴 하나 핵심적인 사건과의 인과관계 연결고리가 약하다는 - 지금의 선택보다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게 좋겠다는 - 자료들이 발굴될 수 있다.
다만 Carr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건 지극히 함축적으로 그리고 간결하게 표현하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며 이 표현이 진리라고 말하는 데는 부족하기에 다시 부연설명을 더한다. 대화의 주체는 개인이 아니며 당시 사회와 오늘의 사회 간의 대화이며 더 나아가 역사란 과거의 사건들과 서서히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목적들 사이의 대화라고 확장한다. 또한 대화를 하는 과정에 어떠한 도덕적 결격사유가 사건이나 인물을 평가하는데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조건도 덧붙이고 있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행동을 했다하여 그 사람이 실행했던 역사적 행동이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러하지라고 수긍하다가도 현실에서 그런 판단에 자유롭지 않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객관성'이라는 부분의 정의에 대해서는 대단히 공을 들이고 있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 의해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일 수 있을 뿐이다. 또한 역사는 인간에 의한 인간 사회를 해석하는 것이기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고도 하였다. 이는 사실상 정확한 객관성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이해되는 부분이다. 최선을 다 하겠으나 결코 끝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노력이다. 자칫 회의주의적 사고로 빠지거나 독자의 힘을 빼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결코 반박하기 어려운 엄연히 사실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된 시점의 전후관계를 연결하는 인과관계는 가치판단의 관계 안에서만 작동하고 '우연(accidential)은 역사의 범주에 들어올 수 없다고 엄중하게 분류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일련의 조건들을 숨겨놓고 있기에 역사를 이해하는 방정식은 더욱더 복잡한데 여기에 더하여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가를 알아야 하고, 또 역사가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살았던 역사적, 사회적 환경 또한 알아야 한다고 숙제를 주고 있다. 누가 글을 썼느냐가 아니라 왜 그 시점에 그런 역사를 기술하였느냐, 어디서 기술하였느냐도 알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겠다.
역사가 단순히 사실의 기술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승리한 자의 기록이라는 것 정도는 대부분 알고 있을 것이다. 과거 수많은 책들이 권력가에 의해 사라진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알고 있다. 평가하고자 하는 시점이 현재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방대한 자료가 있고 살아있는 논쟁과 정치 등 수 많은 이해관계에 얽혀 소신있는 결론을 내리기 어렵고, 반대로 너무 오래되어 기록이 희미한 사건들에 대한 평가는 희미한 실마리로 인해 가설과 추정에 의지하니 논쟁의 소지는 당연하다. 이래도 논쟁, 저래도 논쟁.
가까운 일본은 위안부 피해자가 더 이상 생존하지 않을 시점까지 버티다가 그 이후 본격적인 역사 날조를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정치도 좌파, 우파의 대립의 갈등을 끊임없이 보게 된다. 한 세대가 지나가서 주류가 바뀌면 자연스럽게 갈등의 양상도 바뀌면서 그렇게 역사는 끊임없이 재평가된다. 박정희정권시절을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기념비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으로 평가하기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축적된 민주화에 대한 경험 속에서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재평가를 하기 시작하였고 결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도 잘 살아보세' 보다 개인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정규교육, 미디어, 언론 등을 통해 강제세뇌된 결과물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다 - 그런 평가가 이뤄지는 것은 지금 이 시점에서는 당연시된다. 북한 김정은이 지금 북한땅 안에서는 전지전능한 지도자일지도 모르겠으나 여기 대한민국에서는 분명한 주적이다. 이런 사실이 100년 뒤 역사의 기록 속에서 어떻게 정리되어 일치합의를 하여 묘사될지 상상하면 분단선 철거뿐만 아니라 정신적 통일을 이루기까지 세월은 요원해 보인다.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틀리다는 말도 일단 내가 살고 있는 현재에서만 유효하다. 결국 역사란 역사적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과정이다.
역사는 실체에 대한 인식적 지향들의 '선택체계(selective system)'일 뿐만 아니라 인과적 지향들의 '선택체계'이다 - 탤컷 파슨스 - 진화론의 한 페이지를 발췌한 문장이 아니다. 역사도 역사가에 의해 선택되어야 역사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진리인 듯하다.
Edward Hallet Carr.
PS. 이 책이 스테디셀러를 넘어 고전의 반열로 올라가는데는 명쾌한 정리도 한 몫을 한다고 생각한다. 길고 어렵게 설명하는 건 오히려 쉬운 일이다. 그 반대는 훨씬 어려운 일이다. 수학문제처럼 정답이 있을 수는 없기에 이견이 있을 수 있으니 옮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의 생각을 언어의 도구를 활용해서 짧고 명료하게 수렴한 과정을 볼 때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이런 점에서도 찬사를 받을만한 책으로 추천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