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연습실을 찾았다. 아니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연습실이라는 곳을 찾았다. 가끔 상상 연습을 한 탓에 처음 와 본 곳임에도 오랜만에 온 것 같은 기분에 심지어 아무것도 낯설게 느껴진 게 없었다. 거참. 일요일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도 없고 굴러가는 차들도 없다. 물론 기어가거나 뛰어가는 차도 없다. 건물은 인기척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조용했고, 연습실은 아예 고요했다. 아늑한 조명이 분명 지금 영업 중임을 알려주고 있고 산뜻한 연습실 분위기와 이제 내가 이 고요함을 깬다는 생각이 조금 미안하면서도 설레기도 했다.
그랜드피아노실은 여러 방 맨 끝에 있다. 두 사람이 서로 비켜 지나가야 할 만큼 좁지만 짧은 복도를 따라 끝에 이르렀다. 문을 열고 조명을 켜니 반짝반짝 블랙유광의 야마하그랜드가 놓여있다. 이 덩치를 어떻게 여기까지 끌고 와서 설치했는지, 설마 벽을 뚫었을까? 도저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지만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여전히 익숙한 듯, 냉큼 건반을 열고 의자에 앉아 악보를 꺼낸다. 거리가 한산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방음이 잘 되어 있는 건지 내 숨소리와 뒤적뒤적 몸짓 소리 말고는 들리는 게 없었다. 바로 이런 기분, 내 귀를 정화시켜 주는 이런 기분도 참 좋다. 의자 밑에 나뒹구는 슬리퍼를 보니 사람 사는 게 다 그렇구나는 생각과 함께, 누군가가 이 방에 가득 음악을 채웠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감상은 이제 그만, 손가락연습 할 시간도 없다. 곧장 비창소나타 2악장으로 시작해 본다. 역시나 매일 이 피아노 앞에 앉아 연습했던 사람처럼. 훗. 소리는 맑았고 깨끗했다. 헤드폰에서 벗어난 해방감만으로도 이미 즐거웠는데 손 끝에서 올라오는 색다른 그랜드필의 터치감이 이미 흠뻑 설렌 마음을 더 부채질해 준다. 비록 그랜드 피아노 딱 한대가 들어갈 만큼의 방 크기에 소리가 조금은 왜곡되었으리라는 점을 감안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들어본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는 손길하나하나에서 나오는 소리 한음 한음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그 최고의 경험은 중간, 피아니시모에서 포르테피아노로 급반전되는 부분에 이르러 그랜드피아노라는 게 이런 거다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해 줬다. 사뿐히 눌러보기도 하고, 엉덩이가 들썩일 만큼 내리 쳐 보기도 한다. 혼자서 이것저것 참...
디지털피아노의 음량은 고음부로 갈수록 줄어들고 먹먹해지는 느낌이 있었지만 그랜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2백만원이 넘는 중급사양인데도 말이지... 그랜드는 고음으로올라갈수록, 그리고 내리치는 힘에 따라 있는 그대로 날것으로 표현해 주는 듯 했다. 업라이트도 버리고 2년 정도 디지털로만 연습하다 보니 그런고음부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괜히 움츠러든다. 하지만 자신 있게.지금 시간당 얼마짜리 연습실인데. 손 끝의 강약 그대로 전달되고 반발력으로 올라오는 터치감은 지꾸 손이 가도록 만드는 포근함과 만족감을 주었다. 하지만이것도 익숙해지면 이런 감동은 다시 찾아오기 어렵다는 것도 알기에 오늘 처음 영접한 그 기분을 내일은 없다는 생각으로 온몸으로 흠뻑 받아본다.
쇼팽의 녹턴, 베토벤 바이러스, 엘비라마디간, Standchen... 이것저것 악보집에 손이 가는데로 일요일 아침을 즐겨본다. 기분 좋은 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