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여기까지 했습니다.

마음먹은 대로 다 되면 월드컵 우승했지..

by KayYu

100시간에 가까운 연습에 하면 매끄럽게 풀리는 부분과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는 부분이 나눠지고 안 되는 부분의 개선 속도는 공들이는 시간에 비해 급격히 떨어지는 것도 느낀다. 계속해서 연습하면서 뭔가 나아지기를 보는 것보다 이러다가 내가 미치는 게 더 먼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숨을 고르며 결심한 마음을 열어 놓는다. 여기까지 한다. 그렇게 달려온 길을 멈추고서 뒤를 돌아보고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래도 이거 했습니다' 그렇게 다시 나는 초심자로 돌아가야 했다.


기본기가 없는데 분에 넘치는 곡을 넘봤으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다 다리가 찢어질 뻔했다. 때로는 나의 조급한 성격, 산만한 주의력, 부족한 근력 등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그때그때 마음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가만히 살펴보면서 피아노 앞에서는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고 겉으로는 최대한 공손함을 유지했다. 알아가는 즐거움과 그래도 해내겠다는 욕심이 그 성격을 내리눌렀던 것으로 보인다.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내가 보는 세상의 한계라면 피아노에서 테크닉은 나의 음악 세계의 한계를 넓혀 줄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 한 곡을 습득하기 위해 참으로 무던히 반복하면서 앞으로 무엇을 연습해야 하는지, 어떻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눈과 손가락과 마음으로 답을 찾는다. 예전에는 흘려 들었던 선율을 이제 한 음 한 음 초 단위로 세심히 구간반복으로 되돌려가며 듣고 때로는 피아노 문헌에도 파묻혀 보고 동영상 강좌나 유명 피아니스트의 연주 모습을 화면 뚫어지도록 관찰하기도 한다. 잠시 음악 전공생이 되어 보고 악식, 핑거링, 도약, 페달, 아티큘레이션, 스케일, 암기, 속도, 손가락 독립… 생소했던 것들에 차츰 익숙해져 간다.


즉흥환상곡은 피아노에 대한 즉흥적 결심으로 시작해서 결국 완성하지 못한 쓴 맛을 보았지만 이 세상에 완벽한 실패라는 건 없다. 내가 어디쯤 있는지 나를 알게 해 주었고 가능성도 보여주면서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침도 받았으니 그래도 훗날 절반의 성공으로 얘기할 수 있는 나에게는 굉장히 의미 있고 소중한 역사적인 곡이 되었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가장 뿌듯한 경우가 예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곡을 다시 시도해서 완주해 내어 실력이 향상되었음을 느낄 때라는데 결국 나는 언젠가 다시 도전할 것을 알고 훗날을 기약해 본다.


내가 아는 것, 내가 모르는 것, 내가 안다는 걸 아는 것, 내가 안다는 걸 모른다는 것, 내가 모른다는 걸 아는 것, 내가 모른다는 걸 모르는 것. 이 모든 것들을 되돌아본다.


즉흥환상곡의 도전기는 이쯤에서 마무리해야겠다. 그 많은 곡 중에서 왜 즉흥환상곡이었을까? 누군가 끌리는 이성을 만났을 때 뭔가에 쓰여 한눈에 반하기도 한다. 미술관에 가서 수많은 작품들을 보지만 모든 작품에 끌리거나 호감이 가거나 영감을 받는 건 아니다. 있는지도 몰랐을 정도로 무심하게 지나치는 작품이 있고 한 번 고개가 돌아가는 작품도 있다. 멀리서부터 눈길이 가다가 가까이 가서는 감동의 도가니에 빠지면서 자체 발광하는 환상을 보는 듯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작품도 있다. 유독 나를 강력하게 끌어당기는 힘은 무엇일까? 개인 취향의 발현은 분석 불가능한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의 결과물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만큼 스쳐 지나가더라도 누군가의 취향은 그걸 잡아내고 거기서 감동을 받거나 큰 깨우침을 얻기도 한다. 분명한 것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았다면 결코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지나갔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반대로 나는 거기에 강렬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찾기 위해 많은 시간 동안 방향 없는 길을 따라 헤매고 있었던 상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레카를 외칠 기회는 아무에게나 오지는 않는다. 즉흥환상곡도 과거에 여러 번 들었고 그저 참 아름다운 곡이라며 중얼거리면서 지나쳤던 곡이다. 그런데 그런 곡이 어느 날 다시 내 앞에 나타난 건 어떤 계기로 환경이 바뀌면서 새로운 자극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바꿔 생각하면 새로운 영감과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자극이 필요하고 그 자극을 보다 빠르게 얻고자 한다면 환경을 바꾸는 게 좋은 방법이 된다는 가르침을 준다. 걷는다. 걷고 있으면 주변 환경이 계속해서 바뀐다. 그렇게 새로운 자극은 언제 어떤 형태로 나에게 갑자기 나타날지 모른다. 그걸 받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보이기 시작한다. 평소와 같이 이런저런 음악을 무작위로 듣고 있다가 구름 흩날리는 새파란 하늘 아래 뛰어놀고 있는 정겨운 아이들에 미소 지을 즈음에 들렸던 곡이 즉흥환상곡이다. 그렇게 구름도, 파란 하늘도, 아이들도 없었다면 환상적인 이 즉흥곡은 예전과 다름없이 무심하게 흘러가는 '그냥 아름다운'곡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마음에 꽂힌 강렬한 기억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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