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나 깨나 피아노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세상은 피아노, 가끔 딴생각

by KayYu

뭔가에 빠져본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드라마 정주행도 체질에 맞지 않고 어느 연예인이나 캐릭터에 빠져 덕질을 해 본 적도 없다. 잘해 봐야 우연히 어떤 일본 애니의 화려한 색감에 빠져 매주 한 편씩 올라온 단편을 챙겨본 게 전부다. 과학 뉴스를 탐닉하고 은하수를 찍겠다고 많은 서적을 뒤적이고 소소한 장비도 들였지만 결국 은하수를 찍기 위해 공기 맑고 빛없는 먼 길을 찾아 떠나 밤샐 각오는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였다.


늦게 철이 들었나? 그랬던 사람이 피아노를 공부하겠다고 마음먹고 나니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피아노 생각만 하니 세상은 피아노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면 눈에 콩깍지가 씌듯, 피아노를 앞에 두고 난 가끔 딴생각을 했다. 피아노라는 악기, 피아노 도서, 피아니스트, 피아노 음악 그중에서도 클래식 장르, 그곳에서 울려오는 환상의 소리들이 물에 빠진 생쥐꼴 마냥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그리고 흠뻑 적셔놓고 있다.


피아노곡만 찾아 듣는다. 고전음악의 범위가 너무 넓어 모든 걸 즐길 수 없으니 그중에서도 하나만 쥐어 패자는 생각으로 피아노 곡만 쫓는다. 인생은 짧아 듣고 싶은 걸 다 들을 수 없으니 버릴 건 버려야 한다는 것에는 클래식의 광범위한 장르를 좁혀나가자는 뜻이다. 그래서 어디선가 음악이 흘러나올 때 건반이나 피아노 선율이면 집중하게 되지만 피아노가 없는 음악, 현악 4중주나 대중가요라면 무심한 배경음악처럼 흘려듣거나 건너뛰어 버리곤 한다. 듣고 있는 건반 소리의 연주자를 상상하면서 곡의 어려운 부분들을 가늠해 보고 키 하나하나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몰두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연습했을까, 저걸 얼마나 연습하면 흉내라도 내볼 수 있을까 등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밥을 먹다가도 밥상 위에서 혹은 일을 하다가도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까딱거린다. 출근길에도 점심시간에도 퇴근길에도 서너 번씩 지금 연습하는 곡을 맨 먼저 듣는다. 그렇게 숨 쉴 때마다 피아노 음악을 생각한다.


주말에 향하는 도서관에서는 문학, 예술, 과학 한 번씩 새로 입고된 도서를 뒤적여서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는데 이제는 음악서적으로 곧장 직행한다. 지금 연습하는 곡에 대한 문헌과 피아노 테크닉을 살펴본다. 뭐라도 지식을 얻으면 더 빨리 익힐 수 있다는 최면이라도 걸린 것일까? 같은 책을 보더라도 전에 흡수한 지식과 지금의 지식이 또 다르고 새로운 영감을 준다는 점은 참 고무적이다. 그건 목적 있는 책 읽기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직접 연습하거나 악보를 살펴보지 않았던 곡들에 대한 글들은 아무래도 흡수되는 농도가 분명 다르다. 새로 출간되는 음악 도서가 다른 분야에 비해 많지는 않고,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직접 다루는 책은 드물다는 점은 아쉽다. 미술 관련 도서의 3분의 1 정도로 느껴지는데 그건 보는 건 쉽고 듣는 건 어렵기 때문이라 자문자답해본다.


퇴근길, 지하주차장. 차에서 내린 후 엘리베이터까지 이동하여 더 이상 음악소리가 나지 않는 공간까지 이동하는데 바쁜 걸음이면 30초. 이 시간에 항상 주차장을 감싸는 피아노 멜로디에 몸을 맡긴다. 통상 이런 공간의 배경음악을 깔아준다면 가벼운 재즈음악일 듯 하나, 여기 주차장은 쇼팽, 베토벤, 리스트 등 그래도 대중적인 피아노 곡으로 선곡되어 있다. 항상 그랬다. 그래서 30초가 아니라 애써 느린 걸음으로 3분의 여유를 가져보기도 한다. 때로는 스피커 밑에서 그 곡이 끝날 때까지 감상을 즐겨보기도 한다. 휴대폰을 보고 뭐라도 하는 척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인적도 드물고 조명도 밝지 않은 지하주차장에서 슬로모션처럼 천천히 걸어가거나 멈칫하는 나를 경비실의 CCTV는 멀쩡한 절도범 용의자로 확대해 주시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조명이라도 깔리면 나는 주차장 한가운데서 자동차라는 관객을 앞에 둔 지휘자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피아노 선율은 나의 귀를 즐겁게 해 주었고 무의미한 시간을 의미 있는 시간으로 바꿔주었다. 그렇게 피아노 음악이 들릴 때 눈과 귀와 마음의 쏠림은 이제 본능적이다. 혹여나 지하주차장이 아닌 백화점이었다면 나의 쇼핑을 방해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백화점 점원이 하는 얘기가 들리지 않을 만큼 건반 소리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을 것 같아서.


생각 없이 흘려듣던 유튜브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곡을 무심결에 듣다가 귀를 쫑긋하게 하는 곡이 나타나면 그 작품에 대한 탐색을 시작한다. 여러 연주자의 연주실황을 찾아 듣기도 하고 악보도 찾는다. 해 볼만하다 생각하고 마음속의 버킷리스트에 올라가면 악보를 출력하고 다시 악보를 따라가며 음악을 듣는다. 음악 기호를 읽으며 음악을 듣고 손에 쥔 악보는 그렇게 허공에 떠돌던 디지털 신호를 눈에 보이는 실체로 만들어주는 의미를 준다. 생각을 일시 정지시키고 마음을 훔치는 피아노 울림은 문학이나 다른 예술작품에서 오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듯하다. 무엇이 다른지 글로 정의를 내리는데 익숙한 업무 습관이 여기서도 발휘되어 꽤나 긴 시간을 고민했음에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음을 고백한다. 언어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모두 표현할 수 있었다면 음악이나 미술 같은 예술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설명으로 나의 고백에 힘을 실어 주고 싶다. 피아노 중심의 세상에서 언어는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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