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걸음

초보님께는 배움이라는 특권을 드리지요

by KayYu

악보를 펼치면 음표, 템포, 셈여림이 보인다. 물론 눈은 내가 알고 있는 것만 본다. 샵과 플랫이 많더라도 음표를 보고 어느 건반 위치는 알 수 있다. 그런데 오선지를 벗어나면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계이름을 세어 보아야 한다. 템포는 어렸을 때 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있지만 어느 정도 빠르기인지는 가늠할 수 없다. 셈여림 기호로 f는 포르테라 부르며 강하게 치면 되고, p는 피아노로 약하게 한다는 것 정도도 알고 있다. 기억하는 걸 보면 어렸을 적 그래도 공부는 조금 했나 보다. 점점 세게, 점점 여리게는 모양이 그렇게 생겼으니 다들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정도면 연습을 시작하는데 문제는 없지 않나? 맞다.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사실 악보를 보고 계이름을 읽고 건반의 위치를 맞출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린 피아노를 공부하는데 기본적 소양은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당장 옆에 선생님이 없어도 나는 독립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할 수 있고 관련 정보를 찾아 학습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영어를 공부하겠다는 사람인데 이미 알파벳을 알고 사전을 찾을 능력을 갖췄다는 뜻이니 이제 남은 건 의지일 뿐이다.


곡을 연습하면서 특정 부분에 대해 인터넷에 물어보려 해도 그 부분 혹은 어떤 개념을 지칭하는 뭔가의 이름을 알아야 대화가 될 것 같은데 그걸 도통 몰랐다. 선율, 연주 패턴, 분위기 흐름 등의 개념에는 분명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는 있다. 음악 생활에 깊은 이론 공부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어디 물어보려면 최소한의 용어는 알아야 빠르게 진도를 나갈 수 있겠다 싶었. 음악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내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정확한 단어가 필요함은 진리이다. 별 수 있을까? 모르는 부분이 나올 때마다 하나씩 찾아보는 수밖에 없다.


암보를 하는데 화성학이 도움이 되는 이유도 특정 화음을 기억하는데 손가락의 위치를 눈이나 몸으로 기억하는 것도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텍스트가 있어야 하는데 이때 코드의 이름이 도움이 되긴하는데 코드를 도통 외우질 못하고 있다는 건 나만의 함정. 초견을 시작하는데 음마다 음 높이가 있고 길이가 있지만 실제로 그게 어떻게 들려야 하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익숙한 곡인 경우 이미 많이 들었던 음악이기에 내가 기억한 음의 높낮이와 길이가 버무려진 음악을 먼저 떠올리면서 악보는 그 기억에 맞춰서 읽어내는 것이다. 미스터치와 불협화음, 속도 또한 기억으로 해결해 나간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곡의 악보를 보고 어떤 선율이 어느 정도의 속도로 흐를지는 감을 잡지 못한다. 초견 능력이 빈약해서일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려고 생각했을 때 악보를 펼쳤을 때 모습이었다. 더 이상 드러낼 게 없다.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비기너(Beginner)들의 논쟁들이 있다. 초보자면 초보자인거지 '비기너'라고 하면 뭐가 달라지는지. 체르니와 하논은 기본으로 해야 한다 vs. 하지 않아도 된다. 레가토 대신 페달을 써도 된다 vs. 아니다. 아티큘레이션은 원전을 따라야 한다 vs. 개성 있게 연주하면 된다. 속도는 천천히 올려야 한다 vs. 틀리더라도 원 템포로 해야 한다. 연주는 암기해야 한다 vs. 악보가 있어야 진정 자유로워진다. 스케일과 아르페지오 연습은 날마다 따로 해야 한다. vs. 곡 중에서 익혀도 충분하다. 연주하는데 화성학은 필수이다 vs. 아니다. 흠... 연습이나 하자. 어느 교육자를 따라야 할지 그 고민할 시간에 연습하라고 조언해 주고 싶다.


초보자라면 논란에 대해 판정하고 조언을 할 역량이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는 건 운전면허증도 없는데 드라이브를 어디로 갈지 고민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 같으니 참 아이러니한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게 또 우리의 욕심이니까. 그래도 조금 안심되는 얘기를 해 준다면 어찌 되었건 논란이 있다는 건 많은 경험에서 그 미세한 차이와 장기간에 걸친 영향을 구분할 수준이 되었다는 것과 둘 중 어느 쪽을 하든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만큼 훌륭하다는 것이다. 문제가 있는 방법이라면 이미 오래전에 사장되어버렸을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사장된 교재들도 많고, 그렇게 사장되고 기억에서 사라진 뒤 살아남은 최후의, 최고의 방법만을 지금 우리가 보고 있다고 믿으면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얘기하지만 두 논쟁 중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든 하고 싶은데로, 자기의 취향, 성격에 맞는 데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필요한 건 믿음이다.


초견 연주를 하면서 악보를 눈으로 보고 곧바로 건반을 정확히 짚어내는 건 직관적인 반응이고 학습과 경험의 반복만이 그 직관을 끌어낸다. 경험을 통해 생기는 능력이 직관이라는 것은 많은 심리학적 연구 결과에서도 보여주고 있다. 한 연구 사례로 미국의 응용 심리학자 게리 클라인(Gary Klein)의 직관과 경험의 균형점에 대한 사례가 있다. 그는 아주 짧은 시간에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공군 조종사들의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사례 수집이 쉽지 않아 이와 유사한 소방관의 의사 결정으로 눈을 돌려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 여기서 그는 예상치 못했던 수많은 경험담을 축적하였는데 놀랍게도 소방관 대부분은 자기들이 의사결정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절차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절차’라는 것은 어디에도 글로 쓰여있지 않은 악전고투 했던 현장 실전 경험과 선배들의 코칭을 받아 축적된 노하우라는 것으로 결론 내린다. 수 십 년간 축적된 경험과 전문지식이 비전문가가 볼 때는 놀라운 직관으로 변신해 있던 것이다. 내가 깨우쳐야 할 건 직관력이다.


'직관은 축적된 경험'이라 선언하기에는 우리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고 지금 피아노 연주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을 살짝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다시 직관과 경험 사이에 학습이라는 과정을 추가한다. 뇌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서도 새로운 발상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발상 자체가 독립적으로 발현하거나 활동할 수 없으며 두뇌의 지식과 기억을 절대적으로 그 밑바탕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지식과 기억을 시작으로 많은 사람과 대화하고 낯선 경험과 같은 새로운 자극을 끊임없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지식을 흡수하고 경험을 쌓는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나면 비로소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이나 기억과 비교하여 어떤 지식은 버리고 다시 어떤 지식으로 갈아 끼우기도 하면서 체계를 구축하고 정보를 축적해 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제까지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새로운 발상 즉, 직관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니 드디어 직관과 학습과 경험의 연결고리를 찾은 것이고 학습은 직관으로 가는 과정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소방관으로 20년 근무한 소방 전문가가 현 경제 상황에 적합한 금용 상품을 설계하는데 어떤 통찰력을 가진 직관을 발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앞에 서술된 이야기를 모두 잊더라도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직관이 우리가 직접 경험하지 않은 분야가 아닌 이상, 즉 모르는 분야에서 마치 하늘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믿음, 경험, 학습, 직관, 갈 길은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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