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연주자의 난이도
쉬운 곡을 훌륭하고 아름답게 연주하도록 노력하라. - 로베르트 슈만
리스트 사랑의 꿈과 쇼팽 즉흥환상곡 중 어떤 곡이 더 어려운가요? 제가 치고 싶은 곡들인데 난이도 순으로 정리해 주세요. 아참.. 제가 칠 수 있는 곡은 아니에요. (그럼 왜 물어보시죠? 호기심 천국인가요?)
피아노 독학을 하게 되면 곡의 난이도는 내가 공부할 곡을 선택하는데 정말 정말 정말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단지 그냥 좋아서 일단 들이대 보고 싶다는 마음은 잠시 내려놓아야 한다. 얼마나 어려운 곡인지 모른 채 무작정 덤벼들었다가 나의 수준만 다시 확인하는 교훈을 얻고 처절하게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교훈은 그동안 많이 얻었으니 이제 그만 얻고 싶은데 그게 반복되면 쓰라린 가슴 붙잡고 피아노에 흥미를 잃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심자들에게는 '어렵다'는 점을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 사실 얼마나 어려운 곡일지 스스로 판단하는 것도 어렵다. 손놀림이 따르지 못하는 속도를 경험하고서야 결국 중도포기하고, 전반부 무리 없이 들어줄만하다가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카덴차에서 좌절하고, 방방장처럼 뛰어다니는 도약이나 미끄럼틀 타듯 흘러가야 할 아르페지오에서 미스터치를 연발하여 매끄러움을 끊어 먹는 경험들은 자신의 수준이 어느 쯤인지를 가늠하면서 주관적인 난이도를 결정하게 된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진리는 악보에서도 똑같다. 샵이나 플랫의 개수가 많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숨겨진 부분까지는 직접 부딪혀 본 경험 없이는 그 난이도를 결코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나의 주관적인 기준으로 몇 가지 곡의 난이도를 가늠하기 위한 요소들을 찾아본다.
1. 속도
속도는 정말... 하... 악보 읽기와 테크닉이 어느 정도 갖춰지더라도 장시간에 걸쳐 쌓아 올린 노력의 흔적이다. 그래서 일단 손뼉 쳐 줘야 한다. 그 곡을 연습하기 전에 다른 곡에서 도달했던 속도가 자신의 한계이기에 매번 극복해야 하는 도전 목표와 같다. 속도가 느리다고 쉽다는 의미도 아니지만 속도는 빠르면 빠를수록 어려운 건 분명하다.
2. 샵과 플랫의 개수
초보자들에게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무래도 일단 눈에 복잡해 보이는 게 위압감마저 드니까. 손가락들이 검은 건반과 별로 친하지도 않아 맞춰야 할 것들이 많아지니 불안해지지만 그건 속도의 어려움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느끼는 상대적인 어려움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월광 1악장처럼 빠르지 않으면서 샵, 플랫 4~5개짜리 곡을 어느 정도 매끄럽게 칠 정도만 되면 그런 걱정은 크게 줄어들고 자신감은 한 껏 팡팡~ 부풀어 오른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다음 곡에서는 더욱더 순조롭게 풀어나가는 발판이 된다. 많은 클래식 명곡들에서 샵과 플랫이 없는 C장조는 기대하지 마시라. 다음에 공부할 곡도 마찬가지로 샵과 플랫이 있을 테니 그 흐름을 그대로 살리면 된다.
3. 옥타브
한 손의 움직임 범위가 한 옥타브, 두 옥타브를 뛰어넘는 일이 다반사이면 어려워진다. 한 손으로 4 마디 안에서 2 옥타브를 넘나드는 경우, 두 손의 거리가 5 옥타브에서 놀고 있는 경우 미스터치, 왼 손의 소리에 오른손 멜로디가 묻히지 않도록 하는 것 등 뜻밖의 신나는 혼란에 정신없어지기 시작한다. 물리적으로 손가락이 닿지 않는 위치의 음이 보일 수도 있다. 이건 뭐 가벼이 마음을 비우고 페달을 쓰거나 음을 생략할 수밖에 없다. 왼 손과 오른손의 위치가 벌어질수록 손과 건반을 같이 볼 수 없다는 점도 극복해야 한다. 아무래도 눈동자가 안쪽으로 모일 수는 있어도 양쪽으로 벌리는 능력은 길러지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이건 건반을 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지만 악보를 보거나 건반을 보거나 둘 모두를 동시에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인간은 왜 눈이 두 개밖에 없는지 하늘의 누군가에게 토로하지 마시길. 한 개가 아님을 감사해야지. 아무튼 이런 곡들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건반의 위치를 기억하거나 악보를 기억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잊어야 할 만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난이도를 높이는 요인이 된다.
4. 동시 발음수
화음의 복잡성을 좀 더 넓은 범위의 의미로 넓혀보려고 동시 발음 수라고 하였다. 왼손 오른손 합쳐 5개 이상 동시에 누르고 있으면 어려워지기 시작한다. 화음이 많다면 빠른 악보 읽기, 정확한 타건, 근력 3박자를 요구한다. 약한 손가락이 어디인지도 드러난다. 사실 약한 손가락의 위치는 거의 비슷하다. 엄지 손가락이 약하다는 사람은 아직 못 들어봤다.
5. 아티큘레이션
피아니시모, 피아노 포르테, 꾸밈음, 페달, 이 부분은 초보자들이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지키는 것도 벅차기에 5번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런데 이 부분이 잘 지켜지지 않으면 일반인들이 들어도 '대충'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엉망이라고 할 것이다. 곡을 완성하는데 처음부터 90%까지 가는 것보다 90%에서 95%가 훨씬 어렵고 더 많은 시간과의 싸움이 필요하다. 초보자들에게 이 부분의 비중은 작게 느껴질 수 있고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기호의 의미에 대해 중압감마저 느끼게 한다. 상향 평준화된 점수에서 바지를 뚫고 나오는 송곳이 되려면 위에서 얘기한 5%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마지막 용의 눈이 된다. 그리고 이건 혼자 공부하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찾아내기 굉장히 어려운 부분이다. (그럼에도 난 여전히 독학을 하고 있다... 흠)
6. 테크닉
뭐라 딱 이거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운 용어인데, 분명 곡에는 들어있다. 여러 곡을 다뤄보면 볼수록 무엇이 기교이며, 무엇이 어려운 부분인지 오로지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고 경험해 본 사람들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같은 음표들을 천천히 하면 문제가 안되지만 속도를 높이면 어려워진다. 그렇다 하여 단순히 1번 속도 그룹에 넣기는 부족하다. 특정 부분에서 재빠른 손놀림이 필요하다거나 같은 음 혹은 트릴, 반복되는 패턴을 연타하는 것 들도 악보만 놓고 보면 우스워보이지만 실제로 균일하게 타건하는 건 정말 어렵다. 그저 무념무상 반복처럼 보이는 하논 연습곡도 균일한 음량, 속도를 생각하면 겨드랑이 땀나는 집중력이 필요하다. 엇박자나 특정 손가락이 다른 손가락 아래로 들어가야만 한다거나 좌우 박자가 서로 다른 경우, 잇단음표 등 종류는 셀 수도 없다. 어려운 기교를 완성하고 나면 다른 기교는 쉬워 보일 수 있어서 실력에 따라 상대적이다. 어쩌면 이 표현도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걸 '실력'이라고 부르니까.
여기까지가 지극히 주관적인 난이도 측정법이라면 여기 곡의 난이도에 대한 주제로 전문가의 답변도 찾아볼 수 있다. 헨레 출판사에서는 '난이도 Levels of Difficulty'를 정의하고 출판하는 곡들에 대해 1~9 단계의 난이도를 표기하였다. 기준! 가운데로 정렬! 그래서 독학자들에게 참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Henle, Levels of Difficulty
“난이도에 대한 정의는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입장에서 모두 유용한 가이드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분명 이는 상대적이라는 점이고 누구라도 이 결과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라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어떤 평가이든 주관적이라는 점을 피할 수는 없기에 최대한 세심하고 주의 깊게 작업을 하였다는 점이다. 난이도는 단순히 연주 속도, 음표의 개수, 화음의 배열 순서만 본 것은 아니며 곡 구성요소들 간의 복잡성, 리듬의 복잡성, 초견의 어려움 및 곡의 음악적인 구조의 쉽고 어려움을 핵심 요소들로 고려하였다."
[ I have not just looked at the number of fast or slow notes to be played, or the chord sequences; of central importance are also the complexity of the piece’s composition, its rhythmic complexities, the difficulty of reading the text for the first time, and last but not least, how easy or difficult it is to understand its musical structure. ]
악보 전문 출판사인 헨레 출판사에게 제시한 곡의 난이도에 대한 정의이다. 앞으로 도전하고 싶은 곡들의 레퍼토리를 찾는데 꼭 필요한 정보이다. 하지만 세부 파트까지는 나눠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소나타곡의 1, 2, 3악장의 각 악장별로 난이도가 구분되어 있지는 않다는 의미이다. 난이도를 찾는 이유는 적절한 수준을 선택함으로써 피아노에 대한 즐거움을 유지하는 게 첫 번째 일 것이고, 두 번째는 테크닉 향상은 나의 수준보다 조금 높은 곡을 연습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 어려운 곡 느리게 한다 하여도 얻을 수 있는 건 분명히 있지만 실력 향상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버킷리스트는 늘어나고 있겠지만 자신의 수준에 맞지 난이도로 점프하지 않아야 한다. 3년이 지났지만 아직 즉흥환상곡을 다시 도전하지 않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건 규칙 위반이거든. 그런 의미에서 로베르트 슈만이 한 이야기를 새겨들어본다.
쉬운 곡을 훌륭하고 아름답게 연주하도록 노력하라. - 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