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논 100시간

고전은 결코 당신을 속이지 않는다. 다만 믿음이 조금 필요하다

by KayYu

손가락 독립이라는 게 뭔지. 손가락 힘이라는 게 뭔지? 그런 걸 가져본 적이 없으니 그 느낌은 막연했다. 고개를 뻣뻣이 들지 않고 항상 건반을 바라보며 숙인 채로 다음 타건을 부드럽게 쫓아가는 겸손한 피아니스트들의 약지 손가락이 마냥 부러웠다. 그게 뭐라고 고것 참. 힘이 붙으면 그렇게 된다, 힘? 아령을 들어 올리는 그 힘? 지금은 이것 하나만 알고 있자.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라는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 여러 힘의 원천인 손가락 독립 공부를 위해 하논을 다시 펼쳤다.


공부는 못해도 깨끗한 노트와 필기구, 학습지는 꼬박꼬박 산다. 그래서 나도 하논을 새로 샀다. 30년도 더 된 정겨운 책은 색이 누렇게 변색되고 꼭꼭 눌러주지 않으면 책장을 펼치기 어려웠다. 새로 산 책은 당연히 깨끗할 뿐만 아니라 산뜻한 향기까지 배어 있었고 스프링 판본이기에 활짝 넘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다만, 몇 곡을 넘기다 보니 마디의 간격, 음표 간의 간격이 고르지 않게 인쇄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그게 살짝 신경 쓰이는 부분인데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출판사 책인지는 쉿!)


30년 전의 하논과 새 책을 나란히 놓고 보니 사실 하논이 처음 1873년 출판되어 무려 150년 이상 스테디셀러인 '찐' 고전 아닌가? 처음 인쇄되어 나왔을 당시와 지금을 비교해도 음표의 위치가 변했을 리 없고 하논의 교육정신이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 또한 그대로 일 것이다. 그렇게 오랜 시간, 국경을 넘나들어 인쇄를 거듭하고 있을 것이라는 게 참 경이롭다. 노년의 라흐마니노프도 하논 1번을 연습했다 하니 그게 어쩌다 한 번 해본 것일 뿐이라 할지라도 결코 가볍게 볼 책은 아닐 거이며, 어쩌면 피아노를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의 숨은 스승 아니겠는가?


(작곡자의 머리말) 하논의 목표는

1.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도록 할 것

2. 손가락을 제각기 독립시킬 것.

3. 손가락의 힘을 기를 것.

4. 각 손가락의 힘을 고르게 할 것.

5. 손목을 부드럽게 할 것.

6. 훌륭한 연주를 위하여 필요한 특별한 연습을 모두 넣을 것.

7. 왼손도 오른손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되도록 할 것.


즉흥환상곡을 뒤로하고 나의 수준을 한 참 낮춰 새로운 곡을 시작하기에 앞서 하논만 매일 연습하고 있다. 초견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연주 속도도 충분히 높일 수 있고 온전히 손놀림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적이다. 바쁜 업무가 항상 어깨 위에 붙어 있으니 하루 30~40분 정도 시간을 내어 집중해서 연습하다 보면 이마에 살짝 얇은 땀이 맺히기도 한다. 짧은 시간에 손가락을 놀려야 하니 건반과의 거리, 손목, 손가락의 위치 등 여러 가지에 신경이 쓰인다. 신경 쓸게 너무 많아 소화도 못 시키고 익사할 지경이다.


오른쪽 바깥쪽 힘줄에 통증이 느껴진다. 부실한 근육이 금세 드러났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장 편하고 오랫동안 손가락을 놀려도 힘들이지 않는 위치를 스스로 찾아간다. 그게 하논의 연습 이유이기도 하고. 사실 난 왼손잡이라 왼손이 강해 이런 통증은 항상 오른팔에서만 느낀다. 그렇게 일주일 지나 즉흥환상곡을 펼쳐보면 손가락 놀림이 훨씬 유연해지고 속도에도 진척이 있음을 느껴진다. 오오오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처음 새로운 운동을 배울 때 그 운동을 즐기기 위한 여러 가지 새로운 자세를 연습하게 된다. 지금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자고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붓기도 한다. 평소 안 쓰던 근육을 쓰기도 하고 자신이 버팀량을 넘어서면서 피로가 몰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 반복하다 보면 더 이상 통증은 없어지고 드디어 서서히 즐거움의 단계로 넘어가는데, 안 쓰던 근육이 반복 사용되면서 그 운동에 필요한 부위의 근육량과 버팀량이 늘어난 것이다. 그렇게 몸이 가벼워진다고들 한다. 요즘 내 손가락이 그렇다. 하논 연습을 하는 중에 몰려오는 힘줄 통증이 처음보다는 점점 나아져간다. 자고 일어나면 손가락 마디마디가 욱신거리기도 하고 부어 있기도 하지만 그 통증에 비례해서 손가락의 놀림은 확실히 부드러워졌으니 지금까지 건반 위에서 걸음마를 하였다면 조금씩 깡충깡충 뛰어다니고 있는 듯한 기분. 그 중독성 느낌.


손가락의 독립에는 각 손가락의 독립도 있지만 왼손과 오른손의 독립도 필요하다. 하논 25번을 예로 들자면, 표시된 부분의 손가락 번호를 보면 오른손이 3번일 때 왼손은 4번을 누르도록 되어있다. 무의식적으로 손가락 번호를 보지 않고 연주하면 오른손과 왼손에서 같은 위치의 손가락을 누르기 십상이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게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라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지시된 손가락 번호를 따르는 게 훨씬 해당 손가락뿐만 아니라 연결되는 다른 손가락의 피로를 더 줄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의식적으로 애써서 두 손이 서로 따라가려는 걸 놔두면 미스터치가 되거나 깊이 누르지 못하고 자신 없는 터치가 될 것이다.


하논 25번 손가락 독립, 왼손과 오른손의 독립도 필요하다


고전문학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는다. 어떤 감동을 줄까 기대를 가지고 첫 장을 넘긴다. 하논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정말 도움이 될까 갸우뚱해도 그게 날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는 건 결국에 그 책장을 마지막 넘겼을 때 고전문학과 마찬가지로 나에게 오는 울림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뒤 돌아보지 않고 하논 연습으로 100시간 정도를 달렸다. 초반에 손가락 모양과 균일한 속도 등을 셀프로 교정하면서 30분 정도 집중하기를 하~~ 지겨워할 때까지 해봤다. 입시곡으로도 등장한다는 39번 스케일은 조성 하나에 한 시간을 쏟아부어도 만족스럽지 못한 조성들이 많아 나에게는 엄청 까다로운 부분이었고 뒤돌아서면 금세 까먹긴 했지만 각 조성을 마무리하는 종결에서 화음을 느끼는 것도 39번의 맛이라고 하겠다. (참고로 나는 39번까지만 연습했다)


우여곡절은 결국 시간이 해결해 주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가는데 의미를 두었고 왜 하논을 해야 하는지를 하다 보면 알겠지라고 무작정 시작했는데 그 결과는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겨우 100시간에. (50시간만 해도 변화는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손가락이 가벼워졌고 손놀림이 훨씬 재빨라졌음을 느낀다. 물리적으로 손가락의 무게가 줄어들었을 리는 없겠지만 손가락을 움직이는 근육의 반발력은 부쩍 향상되었음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평소 들던 아령의 무게를 4킬로에서 2킬로로 바꿔 들었을 때 번쩍 들어 올려지는 그 느낌. 건반에서 깡충깡충 뛰어다니면서 손 끝이 건반을 누르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끼면 언젠가는 오롯이 다섯 손가락을 내가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통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논 연습을 하기 전에는 4번째, 5번째 손가락이 건반에 닿을 때 위치가 정확한지 인식도 또렷하지 않았고, 자동 연주에 따라 누르긴 했지만 손가락은 자꾸 하늘로 솟구쳐 오르려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하는 어려움이 따랐다. 손가락이 하늘로 솟구치며 다음 음을 누르는데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고, 빠른 곡을 칠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이다. 팔꿈치, 팔, 손목, 손가락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과 어느 근육이 직접적으로 관여하는지, 어느 근육에 피로감을 느끼는지, 이렇게 작은 근육들의 움직임을 이렇게 흥미롭게 관찰한 적은 없었던 듯하다.


피아노 그립이라는 도구가 있다. 각 손가락이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 근력을 키울 수 있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도구가 손가락 독립에 큰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근육은 팔꿈치부터 손목 사이에 있는 근육이지 손 등에 위치한 근육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논이든 다른 연습곡에서 4, 5번 손가락을 많이 쓰는 곡에서 손가락에 피로보다 팔 근육의 피로와 통증이 집중된다. 바로 그 통증이 나의 연약한 근육을 단련하고 있다 생각하니 괴롭게 느껴지지 만은 않는다. 초보자인 나는 '손가락'의 피로가 무엇인지 아직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그래서 초보자인거지) 여하든 피아노 그립, 악력기 모두 손에 쥐는 힘을 기르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독립과는 무관함을 확신한다.


피아노가 없는 경우 손가락 독립을 연습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여러 방법 중 손가락을 높이 쳐들었다가 내리는 훈련, 책상을 건반이라 생각하고 손가락을 올려놓고 각 손가락을 하나씩 최대한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연습이 큰 도움이 된다. 해당 위치의 근육을 강화시켜 주는 도구도 있기는 한데 안 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결코 지름길이 될 수는 없기에 추천하지는 않는다. 강제적인 근육 강화라면 그 시간에 피아노 건반 위에서 한 번 더 연습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손가락 독립은 4, 5번 건반의 미스터치를 크게 줄였고, '절둑거리던' 아르페지오를 조금 더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고,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았던 각 건반의 균일한 터치와 균일한 세기의 타건에도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력성은 건반을 누르는 게 아니라 부드럽게 굴러가게도 만들어 준다. 그래서 음악의 즐거움은 귀로 듣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손가락을 굴리는 즐거움에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이 모든 게 하논에 녹아 있기에 나는 하논 예찬론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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