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핑거링
평생을 같이 해 왔는데, 이렇게 말을 안들을 줄이야
피아노 건반은 그 펼침이 고른데 손가락의 길이는 제각각이다. 손가락의 굵기, 길이, 들어가는 힘, 모두 폈을 때 건반에 닿는 지점 모두 손가락마다 다르다. 유난히 몽툭하게 튀어나온 나의 손가락은 그 생김새마저 이쁘지도 많다. 그렇게 자유분방하게 태어난 손가락을 평평하고 정확한 간격을 가지고 있는 건반에 맞추려고 하는 걸 보면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감히 인간의 손 모양에 최적의 악기라고는 얘기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위대한 음악가들은 이 부조화 속에서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무수히 많이 창조해 왔다. 흰색 검은색 두 색상의 건반에서 무지개 빛 같은 소리를.
피아노 연습에 있어서 유일하게 나를 도와주는 녀석이 있다면 그건 바로 악보에 적힌 손가락 번호일 것이다. 손가락 번호가 있다면 일단 마음은 훈훈 해진다. 물론 손가락 번호가 모든 음에 다 있는 것은 아니고 특정 음 몇 개에만 번호가 붙어 있다. 모두 붙일 필요가 없는 건 일반적으로 어려워할 가능성이 높은 특정 허둥지둥 영역이 있기 때문이고 손가락 번호는 전문가가 아닌, 배우려는 우리에게 어려운 길을 돌아가지 않도록 지도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정해진 손가락으로 연주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핑거링은 무의식적으로 가장 누르기 편한 위치에서 시작하여 바로 앞음과 다음 음의 관계, 좀 더 시야를 넓혀서 전후 패시지, 전후 마디간의 음의 균형감을 유지하고 손가락의 적절한 배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최선'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건반에서의 팔, 손목, 손의 이동을 최소화하여 에너지 소모를 줄인다는 의미이니 결국 '최소 피로의 규칙'이라고 하면 좀 더 포괄적이고 명확하게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곡 전체를 다 마무리하고서야 특정 손가락에 너무 몰리지 않고 고르게 안배하려는 주의 깊은 손가락 선택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속도가 빠른 곡일수록 손가락 번호는 더욱더 중요해진다. 속도가 빠르고, 곡의 길이가 길고, 많은 손가락이 동원되어야 하는 깊은 화음이 많은 곡일수록 손가락 번호는 단순히 효율적인 손가락의 움직임에 머무르지 않고 지속적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여 지치지 않고 고른음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이니 역시나 최소 피로의 규칙에도 부합하는 작곡가 혹은 편집자의 안목이 되겠다.
피아니스트들이 상급 수준으로 올라감에 따라 생각 없이 아무 손가락이나 사용할 경우, 바로 이런 장점이 훌륭한 연주의 엄청난 장애물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핑거링(Fingering)이란 음을 연주하기 위해 적절한 손가락 번호를 결정하여 사용하는 일을 통틀어 지칭하는 용어이다. 좋은 핑거링을 사용하면 기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음악적 표현도 자연스럽게 해결해주는 열쇠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피아니스트들은 주의를 주지 않는 부분이다. 대부분 출판된 악보에는 음표의 위 혹은 아래에 핑거링이 적혀 있는데 일단 학생들은 이것을 따라야 한다. 악보에 적혀 있는 핑거링은 편집자의 오랜 경험에 의한 결과이므로 우선은 편집자가 추천한 핑거링을 시도해보는 것이 좋다. - 피아노 어떻게 배울까 / 피아노 패다고지, 안미자 교수 -
핑거링을 참 간결하게 설명한 글이다. 여러 서적을 들춰보면 보면 핑거링에 대한 중요성에 대한 얘기의 결론은 항상 동일하다. 나 같은 초보자가 고민을 하는 이유는 그 핑거링이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고 부자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다시 관련 지식을 찾아보곤 하는데 이 생각을 먼저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가의 견해에 반박하고 싶지 않고, 반박하려는 지식과 경험도 부족한 초보자이다. 초보자라면 초보자답게, 그래서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겸손이라는 자세로 믿고 일단 따라 해 보는 게 진리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나는 불의를 보면 참는 성격이다. 이미 앞서 당신이 배우는 사람이라면 전문가의 말은 스승의 말로 이해하고 의심하지 말고 일단 해보자고 했다.
몸이 아파서 포털 사이트에서 증상을 검색해보고 이미 병명을 스스로 결론 내렸다면 병원은 왜 찾아가는가. 의사랑 난상 토론할 거 아니라면 의사 말을 따르는 게 순서일 것이고 핑거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한 번 정해진 핑거링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정답은 아닌 듯하다. 처음 익혔던 핑거링의 위치와 달리 자유자재로 변경해 가면서도 능숙하게 연주할 수준이 된다면 적정하게 번호를 바꿔가면서 표현력에 변화를 주기도 한다.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을 나눠보기도 하고, 좀 더 강한 소리를 내기 위해 약한 손가락보다 강한 1번 손가락으로 바꿔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 변화를 듣는 사람은 눈치채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지만 연주하는 사람의 진심이 녹아들어 가 있고 손가락 번호를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다른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은 신선함을 가질 수 있다면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핑거링은 좀 더 역동적인 음악을 뿜어내는 연주자만의 숨은 도구가 될 것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