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슈탈트 붕괴, 미스터치
잠시 쉬어야 할 때를 몸이 말해주면 잘 들어라.
동일한 프레이즈를 수십 번 반복한다. 안 되는 건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하지만 이유도 잘 모르겠지만 찾아도 사실 별 거 없다. 다시 반복, 반복, 미친듯이 될 때까지 하는 건 연습의 흔한 모습이다. 곡의 완성도는 될 때까지 하느냐, 그렇지 않고 될 뻔했지만 타협하고 멈추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뇌는 손가락 근육에 지령을 내리고 결과 값을 순식간에 피드백하면서 마음에 드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미세한 조정작업을 계속해 나가는 정교하지만 흉내 낼 수 없는 컴퓨터이다. 정확한 타건, 깊이 있는 울림, 재빠른 이동과 방향 전환 등을 한꺼번에 생각해야 하는 머릿속은 뭐부터 해야 할지 엉망진창 무너지다가 닥치는 대로 하면서 자포자기하듯 무너지다가 다시 일어서서 하나씩 틀어쥐고 굴복시키기를 기대할 뿐이다. 뭔가 잘 안 풀릴 때면 수 천분의 일의 속도로 벌새의 날갯짓을 고속 촬영하듯 순간 포착된 영상들, 피겨 스케이팅 트리플 악셀 점프를 최고의 영상기술이라며 3D로 카메라를 돌려가며 보여주는 것 같은 이미지가 머릿속에서 번뜩 불꽃 튀듯 그려진다. 악보를 보고 건반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고 손가락에 움직이라 소리친다. 팔을 들어 올리고 건반을 찾아가는 찰나의 순간 손가락의 모양과 이동 속도를 여러 가지로 시도해 보고 눈은 손가락이 투하될 목표지점의 레이저를 쏘며 확인하고는 영점 조정된 눈금을 보고 발사 버튼을 누른 미사일처럼 뻣어 나간다. 건반을 안 보는 게 좋지만 여전히 실패한다. 그래도 처음 악보를 보고 어쩔 줄 몰라 방황했던 손 끝의 위치는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면서 그동안 답답해 왔던 숨과 끓어올랐던 맥박도 한 숨을 돌린다. 시작 위치, 이동경로, 도착 위치 등의 좌표가 거의 일정하게 흘러가면서 이제 가장 효율적이고 안정된 모습으로 수렴해 나간다. 반복은 우리가 영어 단어를 외우려 할 때 노트에 같은 단어를 계속해서 쓰는 이유와 같지만 머리가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도록 하는 데 있다는 점이 다른 점일 뿐이다. 뇌 과학자가 보면 그게 그것이겠지만. 손가락이 움직여서 건반을 누르는 0.3초를 묘사해 보았다.
그런데 반복 연습을 하다 보면 한계가 오는 순간이 있다. 근육의 피로가 쌓이고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연습을 더 이상 해 나가는 게 어려워진다. 내 손이 내 손 같지 않고, 그걸 조정하려는 마음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몸이 과로해서 지치거나 잠을 자지 못하는 경우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고 아무것도 하기 싫다는 생각조차도 하기 싫은 상황인데, 이런 문제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동작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 듯하다. 마치 게슈탈트 붕괴 현상처럼 특정 대상에 과하게 몰입해서 내가 뭘 하려는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거나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신체에서도 일어나는 듯하다. 사실 '게슈탈트 붕괴'라는 용어는 없다. 게슈탈트는 나의 욕구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의미 있는 행동으로 실천하고 완결 지으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해 볼 수 있는데, 게슈탈트 붕괴는 욕구나 감정이 있는데 그게 행동으로 옮기려 해도 의지대로 되지 않을 때를 지칭하려 만든 비공식적인 인터넷 용어이다. 아마도 신경과학분야에서 이를 지칭하는 다른 전문용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전문 독자에게 맡겨본다. 여하튼 전적으로 손가락과 연결된 근육이 부실하기에 오는 증상으로 보이고 특히나 훈련이 더딘 4, 5번 손가락이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봐서는 근육뿐만 아니라 손가락의 독립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다. 상상의 고속 카메라를 다시 돌려보며 상황을 조금 더 깊이 분해해 나가다 보면 손가락보다 내 정신이 먼저 분해되어 버릴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제가 일어나면 잠시 근육을 쉬고 스트레칭을 해 줄 수밖에 없다. 달아오른 근육에 차가운 물을 부으면 마치 달궈진 프라이팬을 식힐 때 치이익 소리와 함께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솟아오를 것 같은 상상도 해본다. 4, 5번 손가락 연습의 중요성에 대해 잘 알지 못했을 때는 이 부분에 별다른 공을 들이지 않았다. 하논을 시작하고 원 템포로 연속해서 연습하다 보면 채 10분도 되지 않아 4, 5번 연결된 근육에 통증이 오고 손가락의 동작이 굼뜨기 시작한다. 내 손가락이 내 손가락이 아닌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된다. 손가락을 당기는 힘줄이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않고 지친 나머지 먼저 가세요 하면서 혼자 심호흡을 한다. 이 두 손가락의 한계시간을 5분에서 10분으로 늘어나는데 족히 1년은 걸릴 듯하지만 여전히 10분도 자신은 없다. 아주 고르게 두 손가락을 움직여줘야 하는 트릴 연주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채 20초도 어려울 것 같다. 힘, 간격이 고른 연주는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얼마까지 늘려야 하는지 목표는 없지만 수 십 분을 격렬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들에 견주어 본다면 아직 한 참 모자란 건 분명하다.
피아노의 한 옥타브 안에는 흰건반 일곱 개와 검은건반 다섯 개가 있다. 흰건반은 수도 더 많고 손과 눈에서 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식별하기도, 연주하기도 더 힘들다. 검은건반은 거품 같은 흰건반의 바다 위로 솟아오른 빙하와 같다. 이 위에 내려앉는 것이 훨씬 더 쉽다. 교훈: 균형과 기교와 균등을 위해서는 흰건반에 조금 더 집중해야 한다. <러셀 셔먼, 피아노 이야기>
미끌림이 일어나는 이유와 해결하는 방법을 여러 전문가들은 이렇게 조언하고 있다. 첫 째도, 둘 째도 언제나 손가락의 둥근 모양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도약이나 아르페지오에 손가락이 벌어질 때 손목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있거나 약간의 반동만으로는 손가락이 뻗칠 수밖에 없는데 이런 자세로는 손목과 손가락 근육에 부담이 걸리게 된다. 특히 4, 5번 손가락의 힘은 더 떨어지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건반의 제 위치를 누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미스터치는 그저 속도만 늦추면 해결될 상황은 아니고 그 바탕에는 손가락 모양 유지에 집중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아이들이 인라인스케이트를 신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부들부들 거리며 한 발 한 발 혼신을 집중해서 처음으로 서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내딛기 시작하는 것과 다를 건 없다. 그리고 어느샌가 휘파람을 부르며 뒷짐 지고 쌩쌩 달리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훈련의 결과이며 건반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손가락도 건반 위에서 넘어지고 미끄러지지 않도록 위에서 아래로 정확히 누르도록 해야 하고 건반과 손가락과 팔이 가급적 같은 선상에 일직선이 되도록 손목과 팔의 위치도 함께 움직여본다. 그러다가도 누르는 깊이가 깊어지면 또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결국 손가락 모양 유지는 정확한 음을 짚어내는데 중요한 자세이면서 동시에 팔의 피로도를 줄이고 속도를 높이기 위한 기본기라는 것이다. 아하... 깨달음 한 그룻 추가요.
셋 째는 건반의 재질을 신경 쓰고 손이 너무 건조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건 악기의 기계적인 문제이다. 건반 재질 문제인데 디지털피아노와 아날로그(업라이트, 그랜드) 간 재질의 차이이기도 하다. 디지털피아노의 합성 플라스틱 건반에서 오는 미세한 마찰력도 영향을 미친다. 터치감을 얘기할 때 끌고 나오는 주제이지만 이런 재질이 충분히 미끌림을 일으킬 수 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이 두 가지로 연습을 하게 되면 디지털에서의 미끌림과 미스터치가 조금 더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이용해서 역으로 이용하여 디지털에서 미끌리지 않을 만큼 연습하면 아날로그에서는 상당히 개선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미끌림이 많기에 정확한 타점에 더욱 신중을 기하도록 만들어주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디지털피아노의 약점이 아날로그의 강점을 길러주는데 큰 기여를 하게 된 셈이다. 손 끝이 건조하다면 역시나 잘 미끌리게 되는데 같은 건조함에도 플라스틱 재질의 건반에서 영향을 훨씬 더 많이 받는다.
어느 날, 아이들이 장난치면서 옆에서 아빠의 피아노 치는 동영상을 찍었다. 갑자기 미친 듯이 피아노를 연습하는 아빠의 모습이 여전히 낯설던 시기였을 것이다. 쓸데없는 것 지우라고 야단치려다 아이들이 한 번 보라고 들이밀면서 연습 동영상을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와우! 이건 내가 지금까지 상상해 왔던 피아노 치는 자세가 아니다. 손가락과 건반이 거의 일직선이라고 해야 했다. 어깨는 구부정했고 건반 위에 손가락을 걸쳐 올려놓은 듯한 모습이다. 앞서 미끌림에서 손가락 모양에 집중 하자며 혼자 흐뭇해하며 '유레카'를 외쳤지만 실상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상상으로 연습하더니 상상으로 고쳤고 상상으로만 만세를 부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손가락이 쭉 펴진 상태에서는 손 끝이 아닌 지문으로 건반을 누르게 된다. 록 음악의 키보디스트들의 연주 동영상을 보면 달걀을 손에 쥐는 피아니스트와 달리 손가락을 편 채로 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유를 생각해보면 한 대의 키보드만을 놓지 않고 여러 대의 키보드를 위아래 옆으로 달고 있으니 거리가 멀어져 그런 손가락 모양이 나오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고, 무게감 있는 어쿠스틱 건반과 달리 키보드의 가벼움은 굳이 손가락에 힘을 실어 누를 필요가 없기에 그럴 수도 있다. 혹시 정식 피아노 교육을 받지 않고 독학을 잘못 한 것일까? 나름 합리적인 이유를 붙여가며 상상해 보았다. 수직의 손 끝도 아니고 살짝 지문 위치의 탄력을 이용하는 건 지양해야한다. 눕혀진 손바닥은 손가락을 들어서 옮기는 것에 엄청난 부담을 줄 수 밖에 없다. 속도를 높일 수 도 없거니와 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근육의 힘줄에 통증까지 느껴진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정리해보면 손가락 모양을 둥글게 유지해서 정확한 위치에서 수직으로 누르되 깊이 누르면 안 된다는 것. 잘못된 동작은 손가락, 손목 관절에 부담만 더해지고 게슈탈트 붕괴로 이어지고, 결국 안정적인 터치도, 속도도 잡지 못하고 뭉개질 수밖에 없다. 별 수 있나, 닥치고 연습이다. 시간이 해결해 주긴 하지만 시간도 학습하는 자에게만 도움의 손길을 준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