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 암기

그래도 도전한다

by KayYu

후루야 신이치 저, “피아니스트의 뇌” 피아니스트의 신체에 관한 궁금증을 과학적 연구를 풀어낸 책이다. 저자 본인이 피아니스트이자 공학교수, 의학교수인 대단한 분이다. 앞에서 얘기한 세 가지 집중력이 나의 개똥철학의 개똥분석이라면 여기서부터는 과학이다. 그는 암보의 메커니즘을 크게 세 가지로 밝혀내었다. 화상, 압축, 운동 기억이다.


화상은 기억한 그림을 끄집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인데, 피아니스트들이 그림을 보지 않아도 시각피질에 있는 뇌 세포가 활발하게 활동하는 분석 결과로부터 도출한 결과이다. 둘째 압축은 모든 음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않고 패턴이 있는 코드로 암기하는 방법이다. ‘도, 미, 솔’로 암기하지 않고 ‘다장조 1도 화음’으로 입력된다는 것이다. 음악을 표현하는 ‘문법’을 알고 있다면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다. 마지막으로 운동 기억법은 그저 무한 반복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다음 동작을 이어가는 기억법이다. 운동화 끈을 맬 때 순서를 기억해 가면서 매는 게 아니듯. 피아노뿐만 아니라 모든 신체활동이 필요한 부분에서 반복은 의식적으로 기억해내려 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게 된다는 말이다. 특히 음악에서는 청각으로 기억된 멜로디가 강력하기에 이를 바탕으로 세 가지 메커니즘이 적절하게 적용되어 수 십 분짜리 곡이 그렇게 완벽하게 외워지나 보다. 그저 부러울 뿐이고.


암기를 용이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작품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다. 모티브, 프레이즈, 정확한 리듬, 화성의 진행 그리고 곡 전체에 걸친 일반적인 구조를 일찍부터 인식하는 것은 암기의 속도를 촉진시킨다. 경험이 많은 교사들은 이구동성으로 학생들 중 꼼꼼히 정확하게 읽어오는 학생들이 대부분의 경우 비교적 빨리, 그리고 안전하게 암기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읽는 습관이야말로 전 학습 과정에서 매우 결정적인 요인이다 – 피아노 어떻게 배울까 / 안미자 교수 -


악보를 외우는데 과연 특별한 방법이 있을까 기대했던 나는 이런 결과를 예상했음에도 아쉬움이 있지만 여러 가지 힌트는 얻을 수 있었다. 작품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해체해 보는 일을 하면 곡의 흐름을 파악하게 하고 자연스럽게 기억되는 과정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음악을 작곡하는데 필요한 문법을 알고 있다면 더욱 쉬울 것은 말할 것도 없을 듯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문법을 익히는 것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설사 그 문법을 배운다 하더라도 그것을 곡을 통해 익히지 않으면 제대로 익혀진 거라 할 수 없는 반쪽짜리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그래서 암기를 해야만 온전히 손끝과 자신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은 동감하는 부분이지만 초보자인 나는 귀로 익히고 그걸 쫓아 올바른 위치를 짚어내는 반복되는 연습뿐인 듯하다. 후루야 신이치의 세 번째 방법이다.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암보를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암보를 하면 음악이 비로소 내 것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암보를 해야 할 이유가 된다. 작품의 구조를 익히지 못하고 곡 전체 흐름도 모른 체 부분 부분 한정된 길지 않은 구간에서의 암기로 순간 몰입되는 경험은 유독 중독성이 강하게 느껴진다. 내 것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선 느낌에서 오는 중독성. 손 끝에만 집중할 수 있기에 오는 즐거움의 중독성. 그런 중독에 환호하며 쌓아간 연습은 더욱더 머릿속에 생생하게 새겨지고 손가락도 기억하고 있다. 건반 앞이 아니라면 출퇴근, 점심시간은 그 패시지를 상상하며 굴러가는 손가락을 상상연습하는 시간이 된다.


암기가 이리도 어려우니 어느 공연장이든, 어떤 조명 아래든, 어떤 소음 환경이든, 어떤 피아노든, 어떻게 조율된 피아노 든 가리지 않아야 할 피아니스트들은 진정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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